[엄준호의 유럽축구일기] 리버풀, 축구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정취
입력 : 2015.08.29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영국 머지사이드 주를 연고로 하는 리버풀. 이 항구도시에는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두 개의 구단이 있다. 그 중에서 붉은 유니폼을 입는 구단, 리버풀 FC를 경험했다.

'구단' 리버풀은 세계적으로 두터운 팬을 보유한, 깊은 역사가 있는 명문이다. 함께 머지사이드 주를 공유하는 에버턴과 견원지간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는 매년 치열한 '노스웨스트 더비'를 벌인다. 1892년 창단해 현재까지 총 18회의 리그 우승을 했으며 5 차례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지난 겨울, 영국 날씨는 꽤 쌀쌀했다. 얼굴 표면으로 닿는 바람은 차디 찼고 손은 시렸다. 안필드서 리버풀과 웨스트햄의 프리미어리그 23라운드 경기가 있던 날은 1월 31일. 당시 리버풀은 8위를 기록하며 부진했으며 웨스트햄은 7위를 달리고 있었다.

한치 양보할 수 없는 승부였다. 이에 많은 관중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찾았다. 웨스트햄서 기차를 타고 온 원정 응원단도 찾아볼 수 있었다. 양 팀 팬들 모두 각자 응원하는 클럽의 승리를 기원했다.



안필드 정문 근처에서는 '레전드' 빌 샹클리의 상이 세워져 있다. 샹클리는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감독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2부리그서 허덕이던 리버풀을 1962년 무패우승으로 이끌며 보란 듯이 승격시킨다.

1부리그로 올라온 후 리버풀은 3차례의 리그 우승과 두번의 준우승을 이뤘다. 1973년에는 UEFA컵 우승을 차지하며 유럽 무대에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Form is temporary, Class is permanent)"라는 명언으로 아직까지 축구팬들과 함께하고 있다.

아름다웠다. 천연잔디의 푸르른 색감, 그리고 관중석 적색 의자들과의 조합이 완벽히 어울렸다. 잘 꾸며진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팬들은 시간보다 일찍 좌석을 채우기 시작했고 뜨거운 분위기는 응원가로 이어졌다.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걸어가라, 가슴에 희망을 안고). "You'll Never Walk Alone"(넌 절대로 혼자 걷지 않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양 팀 모두 베스트 라인업을 가동시킨 가운데,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웨스트햄은 캐롤과 발렌시아를 앞세워 공격을 전개했고, 리버풀은 스털링과 쿠티뉴가 골문을 두드렸다.

전반에는 골이 터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 5분, 스털링이 선제골을 넣으며 관중석의 열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이후 웨스트햄의 다우닝이 날카로운 크로스를 통해 동점골을 노렸지만 부족했다.

결국 후반 34분 부상을 털고 교체 투입된 스터리지가 쐐기골을 박으며 경기는 리버풀 쪽으로 쏠렸다. 리버풀이 홈에서 2-0으로 승리를 가져갔다.

프리미어리그의 속도감. TV로만 보던 스타 플레이어들이 경기장을 누비는 모습. 관중석의 뜨거운 분위기. 이 세 가지 요소가 완벽히 뒤섞여 환상의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다음 날 일요일 아침, 리버풀 구단 투어에서도 마찬가지로 흥미로웠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통산 5 차례 우승하거나 연속 3회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 '진품' 빅이어를 영구 소장할 수 있게 된다. 프리미어리그 구단 중에서는 리버풀이 유일하게 구단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리버풀은 지난 2005년 결승에서 극적으로 AC 밀란을 꺾고 통산 5회 우승을 확정지었다.

리버풀은 '힐스보로 참사'라는 슬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89년 4월 15일, 셰필드에 위치한 힐스보로 경기장에서 열린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 경기서 팬들의 몸싸움으로 인해 경기장이 무너지면서 96명의 리버풀 팬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에 리버풀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건을 추모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도 사망한 팬들의 물품을 보관하며 그들의 영혼을 기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근처에 위치한 리버풀 대성당을 방문했다. 웅장했다.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성당이다. 이곳에는 조각가 앤디 에드워즈가 조각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전쟁이 한창이지만 영국 군인과 독일 군인이 서로 축구공을 사이에 두고 악수를 청하는 모습의 조각품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크리스마스 때만이라도 전쟁을 잠시 멈추어 달라며 호소했다. 이에 동요한 영국군과 독일군은 참호와 참호 사이에 널브러진 시신을 함께 수습했고,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같이 땀을 흘리며, 공을 차며 땅을 굴렀다.

그들은 잠시나마 서로 형제간의 정을 나누며 전쟁이 끝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죽음과 절망뿐인 전쟁터에서 축구는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축구는 위대하다. 리버풀에서 보고 느낀 축구는 감동 그 자체였다. 팬들은 입을 모아 함께 응원가를 부르며 전율을 생성해냈다. 단지 승부를 겨루기 위한 스포츠가 아닌, 재미를 위한 놀이가 아닌,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었다. 리버풀과 축구. 사람과 사람을 잇는 귀중한 동아줄이었다.


글, 사진= 엄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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