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준호의 왼발잡이] 라니에리는 명장이 아니었다
입력 : 2016.05.03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엄준호 기자= 레스터 시티(레스터)가 132년 만에 동화를 완성했다.

3일(한국시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36라운드에서 토트넘이 첼시에 2-2로 비기면서 매직넘버는 0이 됐다. 레스터가 창단 첫 EPL 우승 타이틀을 따냈다. 1884년 시작된 레스터 역사는 132년이 지난 후에 기적을 썼다.

레스터의 올 시즌 우승에는 리야드 마레즈, 제이미 바디, 은골로 캉테 등 핵심 플레이어들의 활약상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바디는 22골로 공격을 이끌며 리그 최고 공격수 반열에 올랐다. 이외에도 여우군단 모든 선수들이 똘똘 뭉쳐 하나가 됐고, 우승을 만들었다.

선수들 못지않게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 또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2015년 7월 레스터의 지휘봉을 잡은 그는 강등을 걱정하는 팀을 한 시즌 만에 완전히 탈바꿈했다. 유럽대항전에 출전하기만 해도 엄청난 성과로 칭송받을 테지만 내친김에 우승컵을 거머쥐고 말았다.



라니에리 개인 커리어에 있어서도 이번 우승은 뜻 깊다. 클럽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첫 리그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첼시, 유벤투스, AS로마, 인터 밀란 등 굵직한 구단을 여럿 맡으며 지도력을 드러냈지만 리그 우승을 선사하진 못했다. 이에 라니에리는 '무관의 제왕'이라는 웃지 못 할 별명을 얻기도 했다.

4-4-2 전술을 고집하는 '구식' 전술가이기도 하다. 늘 최전방에는 두 명의 공격수를 세웠고 포백을 가지런히 했다. 이번 시즌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바디, 오카자키가 골을 넣도록 했고 마레즈, 마크 올브라이턴 등 윙어가 측면을 휘젓게 했다.

막상 시즌이 시작되어 뚜껑을 열어보니 기존의 4-4-2와는 사뭇 달랐다. 점유율도 한참 밀렸으며 하위권 팀의 전술과 유사한 형태로 전개됐다. 선수비-후역습 테두리 안에 모든 게 진행됐다. 그러나 레스터는 수많은 경기에서 이겼다. 이론적으로는 모두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놀랍다.



명장보단 덕장에 가깝다. 라니에리는 화려한 전술을 구사하는 인물도 아니고 후반 번뜩이는 용병술로 분위기를 끌어오는 '천재'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시즌 그에게 있어 가장 빛난 무기는 '따뜻함'이다.

시즌 도중 "무실점 승리 시 피자를 사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며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했다. 연봉 수억, 또는 수십억을 받는 선수들이 피자가 먹고 싶어서 안달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형태의 자극은 팀이 하나가 되는 데 도움을 줬고 지속성을 줬다.

루이스 판 할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간 4,500억 원 가량의 천문학적 이적료를 쏟았다. EPL 무대에서 뼈가 굵은 아르센 벵거의 아스널도 패권에 도전했다. EPL 우승을 경험한 마누엘 페예그리니와 스타플레이어들을 업은 맨체스터 시티, 2연패를 노린 첼시 등을 제치고 라니에리는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 자신 있게 "나 라니에리오"하고 명함을 내밀지 못할 '2인자'였기에 이번 우승은 더욱 의미가 있다. 커리어가 화려하다고 꼭 우승을 하는 시대의 흐름을 깨는 통쾌한 순간이다.



이제 레스터는 홈 킹파워 스타디움에서 홈팬들과 함께 축제를 즐긴다. 에버턴을 상대하지만 결과는 크게 의미가 없다. 우승은 이미 확정이다. 그럼에도 라니에리의 레스터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열렬한 성원을 보내준 팬들에 대한 예우를 갖출 예정이다.

조만간 두둑한 보너스와 함께 재계약을 맺을 전망이다. 클럽 벽면에는 명장으로 도약한 라니에리의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다. 라니에리의 64세 인생은 이제야 비로소 꽃이 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레스터 시티 인스타그램

*전 세계 인구 중 왼손잡이 비율은 약 12%로 알려졌다. [엄준호의 왼발잡이]는 오른손잡이 88%의 주된 생각 대신 소수의 다른 관점, 생각으로 이슈를 바라본다. 축구에서 때때로 오른발보다 왼발이 더 치명적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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