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택의 제대로축구] 차범근-허정무, ''벌써 30년? 아직도 많이 아쉽지''
입력 : 2016.07.10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홍의택 기자= 현지 시각으로 1986년 6월 2일 오후 1시. 고지대에 뙤약볕까지, 멕시코시티 공기가 어색했습니다.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만난 상대는 당대 최고 마라도나를 품은 아르헨티나. 32년 만에 나선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임에 긴장은 극에 달했죠.

20분도 채 안 돼 두 골 먼저 얻어맞았습니다. 겨우 정신 차리나 싶었더니 후반 시작부터 또 한 골 내줬습니다. 패색 짙었던 후반 중후반, 박창선이 월드컵 본선 첫 득점을 뽑아낸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습니다. 1-3 패배. 아쉬움도, 후회도 컸습니다. 그런데 첫발을 떼고 나니 묘하게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함께 피어오르더란 겁니다. 90분이란 짧은 시간, 그 안에 참으로 많은 게 담겨 있었다고들 입 모읍니다.

■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워 싸웠다①(다시보기 클릭)
■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워 싸웠다②(다시보기 클릭)
■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워 싸웠다③(다시보기 클릭)


운 좋게도 'MSN(리오넬 메시-루이스 수아레스-네이마르) 트리오'를 현장에서 몇 차례 관찰했습니다. 유럽형 스리톱을 갖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는 또 다른 맛을 풍겼습니다. 순간적으로 주는 모션에 타 인종은 흉내 내기 어려운 리듬이나 탄력이 스며 있었습니다.

현지에 동행한 모 축구 지도자와 그 감상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얘기가 "남미 애들이 상당히 유연해 보여도 무른 체형은 아니야". 그러면서 꼽았던 다소 극단적인 사례가 마라도나였습니다. 이 괴물과 실제 부딪혀봤다는 어느 선배의 아르헨티나전 이야기를 전하며 '벽에 들이받는 느낌'이란 표현을 꺼내더군요. 더불어 이날 한 경기에서 마라도나를 번갈아 맡았던 인원이 총 네 명에 달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물론 같은 남미 출신이란 이유로 마라도나와 메시를 한 범주 안에 묶기엔 체감 자체가 많이 다릅니다).

'1986 멕시코 월드컵 30주년'을 기념해 총 세 편으로 엮은 건 단순 마라도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스타 플레이어, 이 선수와 뒤엉켜 싸웠던 아르헨티나전, 그리고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이 지나서야 그 무대를 다시 밟을 수 있었던 당시의 대표팀으로 확장하려 했습니다. 지금은 당연시된 월드컵이 상상조차 못한 큰 산이었고, 세계 조류와 동떨어진 채 맨주먹 하나로 버텨야 했던 그 시절의 조각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다들 하나같이 되묻습니다. "진짜? 그게 벌써 30년이 지났어?". 그리고선 '아쉬움'이란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습니다. 월드컵이 어떤 대회인지 조금만 더 알고 갔더라면, 우리를 지원해줄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이 조금만 더 받쳐줬다면.





■ 김정남(43,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 감독 / 현 OB 축구회 회장) = "마라도나가 특출하다는 것만 알았지. 스포츠 뉴스에서 하이라이트 잠깐 다뤄주는 것 보고선 어떻게 파악이 됐겠어요". 스스로 긴장했거늘, 선수들까지 이끌어야 했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것도 김호곤 코치 둘과 모든 짐을 짊어져야 했던 때. 김 감독 홀로 했던 속앓이도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됐다.

"지금이야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지만, 정말 쉽지 않았어요. 마라도나란 한 선수가 경기를 운영해나가는 속도, 돌파 능력, 적시에 연결하는 패스 타이밍이 진짜 정교했거든요. 그런데 다른 나라와 붙을 때 보니 오히려 우리랑 할 때보다 낫더라고요. 골도 계속 넣었고요. 그래서 '우리도 좀 괜찮게 막았나?'라는 위안도 되더라고요(웃음). 솔직히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을 보고 자란 세대가 아니었잖아요. 가끔은 '그때 선수들이 지금 환경에서 경기를 치렀으면 어땠을까', '타임머신 타고 오면 안 될까'라는 생각도 해요(웃음). 그만큼 많이 아쉬워요. 아무것도 모르고 나가 1무 2패를 했는데, 그래도 내용 면에서 우리도 가능하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를 느끼고 왔죠"

■ 차범근(33, FW, 바이엘 레버쿠젠 / 현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 당시 대표팀 멤버 중 유일한 해외파. 마라도나가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악수를 청했던 '갈색 폭격기'. 은퇴 직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자 나선 월드컵이었으나, 높디높은 기대치에 살짝 못 미친 감도 없지 않다. 그 이면에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부상이 있었으니.

"나는 그때 참 진퇴양난이었어요. 오쿠데라(베르더 브레멘 소속, 일본 국적으로 아시아 최초 분데스리거)에게 발목 뒤를 찍혔는데, 경험이 없어 얼음만 대고 말았지. 이게 월드컵 가까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거예요. 분데스리가 시즌 다 뛰어놓고선 국가가 부를 때 되니 아파서 안 간다고 할 수도 없고. 괜한 오해 살 수도 있어 수술도 못하고 어떻게든 갔죠. 결국 이 부위가 발목을 잡더라고. 멕시코에 가서는 복숭아뼈 뒤로 힘줄이 튀어나와 말썽을 일으켰어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맨날 칭칭 감고 운동했죠. 그러다가도 아프기 시작하면 가슴 속에 뜨거운 게 훅 올라왔다 내려가고 그랬어요. 아쉽기는 해도, 이 이야기가 그 시대를 한 번 회상할 기회가 되네. 월드컵, 그거 상상도 못하던 거였거든. 후배들이 예선 통과를 해준 덕에 나도 한 번 경험했으니 그저 고마웠죠. 축구 선수로서 이 대회 한 번 나간 것과 못 나간 것이 천지차이인데, 그 자존심을 세워줬잖아."





■ 조광래(32, MF, 대우 로얄즈 / 현 대구 FC 단장) = 허정무, 박창선과 함께 1980년대 대표팀 허리를 책임진 부동의 미드필더. 김정남 감독이 마라도나를 묶을 전략적인 수(김평석을 선발로 내보내 대인 마크 지시)를 택하면서 아르헨티나전은 교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전반 20분도 안 돼 두 골을 내주자, 부랴부랴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조광래 투입 후에야 전진 패스가 살아나며 한국도 정상적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아, 큰일 났네. 나도 나이를 이렇게 먹었나. 그때 두 골 먹고 급해지니까 벤치서 막 '광래 준비! 광래 준비!' 외치는 거라(웃음). 마라도나는 정말 메시 이상의 폭발력이 있었지. 영국 상대로도 몇 명씩 제쳐 골 넣고 했으니까. 그런데 우리도 그때 멤버들이 진짜 좋았거든요. 경험도 있었고, 나름대로 특징도 있었고. 또, 기질이나 근성도 있었고. 우리가 사전에 그런 세계적인 팀들과 경기를 조금이라도 해봤다면 어땠을까 싶네. 그 당시에도 유럽이나 남미는 템포가 어마어마하게 빨랐어요. 그런 경기를 경험해보질 못했으니 후반 가서는 빨리 지쳤지. 참, 그랬을 때가 있었어. 지금 책상에 이렇게 앉아 있는데도, 또 선수 하고 싶네. 어떡하나(웃음)."

■ 허정무(31, MF, 현대 호랑이 / 현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 = 해외 진출이 '하늘의 별 달기'였던 시절. PSV 아인트호번서 뛰며 차범근, 조영증과 더불어 선진 무대를 경험하고 온 핵심 자원. 아르헨티나전, 그리고 마라도나를 논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인물로 통한다. '태권 축구'로 명명돼 전해져 내려왔으나, 본인은 지금도 억울하다. 리플레이를 수차례 돌려보니 빗맞은 마라도나가 필요 이상으로 데굴데굴 굴렀다는 감도 없지 않다.

"마라도나가 심판들에게 부담 주려고 미리 어필하고 그랬죠. 결국엔 그런 것도 심리전인데, 그 수가 얼마나 높았겠어요. 1986 멕시코 월드컵은 사실상 마라도나 원맨쇼였어요. 스탭 밟는 게 정말 뛰어났고, 상대방 중심을 역이용하거나 볼을 터치하는 게 일품이었죠. 그런데 이 선수가 가장 못했을 때가 우리와의 첫 경기였어요. 지금은 대표팀이 유럽, 남미 강팀들과도 붙잖아요? 그때는 아시아권 밖 팀과는 만나볼 수가 없었어요.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였죠. 그저 자기 노력과 근성 갖고만 볼 찼던 때예요. 이제는 변방이 아니라 세계적인 무대에도 섰는데, 후배들이 자신감 갖고 더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 이보상(33, 스포츠서울 기자, 멕시코 월드컵 현지 취재) = 현장 분위기를 한국으로 타전한 산증인. 미국 환승 비자를 받는 데만도 꼬박 고생했건만, 현지는 더 열악했다. 노트북도 없던 시절, 팩스를 통해 기사를 송고했다. '이제 다 됐다' 싶었더니 동행한 사진 기자의 이미지가 제때 전송 안 돼 속을 태웠다.

"기자 생활하면서 걱정이 많았어요. '이걸 어떻게 알려야 하나', '있는 그대로 다 써야 하나', '어떤 수위로 표현을 해야 하나'. 해외 출장 중 대표팀 성과가 좋지 않으면 고민이 더 커지죠. 그래도 그 시기를 넘었기에 현재가 온 게 아닌가 해요. 80년대 중반 한 프로팀 훈련장에 가봤던 기억이 나요. 시멘트로 된 바닥에 역기 몇 개 있고, 그냥 무작정 드는 방식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더군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개인 맞춤형? 그런 건 상상도 못했죠.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운동장 수십 바퀴씩 도는 문화였거든요. 그래도 1986 월드컵, 2002 월드컵 등이 기폭제가 돼 많은 변화를 거쳤어요. 그런 점에서 참 의미가 큰 대회였죠."





■ 최순호(24, FW, 포항제철 아톰즈 / 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 차범근이 독일에서 고공 비행했을 무렵, 국내에서는 최순호가 신흥 에이스로 떠올랐다. 전자가 다부지고 힘 있는 플레이를 펼쳤다면, 후자는 장신에도 부드러운 몸짓으로 지켜보는 이들을 매혹했다. 스스로 '아름다은 축구'를 하고 싶었다던, 어쩌면 천재에 가까운 유형이었다.

"운동장 들어가서 애국가 나오고 그럴 때 되니 좀 먹먹하더라고. 그때는 프로 선수로서 부와 명예를 누린다기보다는 애국심, 사명감으로 볼 찬 시절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관중석에 있는 팬들을 놀라게 하는 축구를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마라도나를 의식 못했어요. 사실 공격수 대 공격수라 부딪힐 일도 많지 않았고, 원래 긴장하면서 경기 뛰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런데 내 이상과 관련해서는 70점밖에 못한 대회지(웃음). 요즘도 마라도나가 가끔 언론에 나오고 하면 '아, 우리랑 그때 게임했었지' 싶어요. 1979년 일본 세계선수권대회 때부터 줄곧 엮여온 또래인데."

■ 박창선(32, MF, 대우로얄즈, 대표팀 주장 / 현 김해 박창선 축구 클럽 총감독) = 0-3으로 끌려가던 대표팀에 단비 같은 만회 골을 내렸다. 고지대 적응 실패로 선수단 전원이 끙끙대던 때, 홀로 배탈까지 겹쳐 사흘을 굶고 경기에 나서야 했던 캡틴. 오른발로 마무리한 드롭성 슈팅은 대한민국 역사상 월드컵 본선 첫 득점으로 남았다.

"요새는 초등학교, 중학교도 코칭스태프를 두 사람만 쓰는 데가 잘 없어요. 그런데 김정남 감독님, 김호곤 코치님 둘이 우리 이끌고 갔죠(웃음). 글쎄, 경험이라. 월드컵 앞두고 유럽에 한 20일 정도 갔었나. 독일 쪽으로 해서 모나코 등을 거친 적이 있죠. 그쪽 2~3부 리그 팀하고 경기도 했고. 또, 대회 직전 미주에서 전지훈련 했고. 그게 국제 경험 전부였어요. 참 웃긴 게 마지막 이탈리아전(2-3 패)을 비겼으면 16강에 갈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르헨티나-불가리아 경기 결과를 알아봐 줄 사람이 없어서 그것도 모르고 뛴 거죠. 다 지난 후에야 알았어요(웃음). 세월 참 빠르네요. 다들 바쁘다 보니 함께할 시간을 거의 갖질 못했어요. 그래도 한 번씩 조용하게 돌아보면 그때가 정말 뜻깊고 행복했다 싶죠. 우리들의 추억이잖아요. 맞다. 11월에 무슨 행사가 있다고 전화가 왔던데, 다 같이 한 번 볼 수 있겠죠? 그때 친하게 지냈던 기자님들은 뭐하며 지내는지 궁금하네."

■ 한준희(16, 고등학생 축구광 / 현 KBS 해설위원) = 한 위원은 시청자로, 축구 팬으로 당시를 회고했다. 지금도 본인 마음 속으로는 1986 월드컵 대표팀 멤버를 으뜸으로 친다는 그. 모든 능력치가 고르게 분포되길 요구하는 현 풍토와 달리, 특정 기량으로 팬들을 매료했던 당대를 그리워한다.

"86년 월드컵 때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어요. 전 국민이 엄청나게 흥분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인터넷이 어디 있어요. 상대 팀 분석은 기대도 못하고, 심지어 에이스가 누구인지도 몰랐죠. 지금 말하고 있는 마라도나 역시 그 이후에 얻은 정보로 말하는 부분이 크죠. 그런데도 참 악바리 같은 축구를 했다는 게 떠올라요. 졸전처럼 보이는데도, 다들 장기가 있고 특색을 갖췄으니 뭔가 뚜렷한 색깔을 내곤 했죠."




■ 박경훈(25, DF, 포항제철 아톰즈 / 현 전주대 축구학과 교수) = '허정무vs마라도나'의 대결 구도는 일부에 불과하다. 마라도나의 첫 번째 맨투맨은 현대 호랑이 소속 김평석. 하지만 기대만큼 되지 않자, 상대와 포지션이 겹쳤던 김용세가 이를 이어받았다. 그다음 주자가 허정무였으며, 박경훈이 마무리 임무를 수행했다. 체구 및 성향상 마크맨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받았던 박경훈은 후반 중반이 되어서야 마라도나와 싸우기 시작했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웃음). 참, 그 곰 같던 마라도나 막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괜히 지친 티 내면 더 날뛸까봐 일부러 숨도 참고 그랬는데. 그런 세계적인 선수를 경기 시작부터 맡았으면 어땠을까 내심 아쉬운 것도 있어요. 대회 서너 달 전부터 개인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 양을 엄청나게 늘렸었거든. 오늘 '마라도나에 대해 얘기하자'고 약속 잡고 나오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그 멤버들, 정말 훌륭한 선후배 및 동료들과 공 찰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고요. 다른 분들도 만나면 꼭 물어봐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실 거예요."

■ 조민국(22, DF, 럭키 골드스타 황소 / 현 청주대 감독) = 당대 스리백의 스위퍼를 맡았던 헤더 머신. 수비수이면서도 정작 마라도나와 직접 부대낄 장면은 많지 않았다. "내가 막기도 전에 앞에서 다 잘라버렸으니 원". 오히려 파울 장면을 목격하며 마라도나의 위대함을 느꼈다던 그다. 정강히 보호대를 종아리에까지 두르고선 몸 중심을 살짝 띄워 태클을 피하던 그 재간에 거듭 감탄했다.

"참 열악했지. 5~10불짜리 도시락 사 먹고. 코인 빨래방 가서 직접 세탁하고. 볼 바람 넣었지, 간식 챙겼지. 지원 스태프? 그런 게 어디 있었겠어? 돌아보면 많이 아쉬워요. 그때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 지금 환경에서였다면 정말 몸 관리 잘하면서 준비했을 텐데(웃음). 경기 들어갔을 때도 괜히 주눅이 들어갖고는. 그렇게 많은 관중 앞에 가니 무슨 벌집에 들어간 거처럼 '우웅' 소리가 나더라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표현 못 했다는 게 가장 아쉽지. 게임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화나는 게 그거였다니까."

■ 김주성(20 ,MF, 조선대 / 현 대한축구협회 심판운영실장) = 김정남 감독은 최종 엔트리 22인에 대학생 셋을 채워 넣는다. 고려대 김종부, 한양대 유병옥, 그리고 조선대 김주성. '박종환 사단의 영웅' 김종부가 넣은 불가리아전 골, 그 이상의 임팩트를 남긴 이가 '아시아의 삼손' 김주성이었다. 공격수 계보를 이어오던 차범근, 최순호와 함께 스리톱을 이뤘던 이 대학생은 존재만으로도 강렬했다. 아르헨티나전 대표팀 포지션에 대한 증언이 엇갈렸던 가운데, 팀 막내로서 선배들에게 직접 전화 돌려 위치를 확인해주는 수고로움까지 자처했다.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목표가 굉장했어요. 선배들과의 경쟁보다는 축구에 대한 열정, 승부욕, 집착에 몰입했거든요. (차)범근 형께도 지고 싶지 않을 만큼 당돌했으니 위축되는 일도 전혀 없었어요. 사실 모르고 지나갔다는 표현이 맞겠죠(웃음). 어쩌면 그 멤버들이 32년 만에 월드컵에 눈 뜨게 했잖아요? 2002 월드컵 포함해 지금까지 연속 진출을 이어왔는데, 그 첫 테이프를 1986년에 끊은 게 아닌가 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고작 16년 뒤 월드컵 4강을 이뤄낸 걸 보면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그만한 잠재력도 갖추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 부분을 정말 높게 평가하고 싶어요."


+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팀은 오는 9월부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 돌입합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부터 이어온 연속 진출의 횟수가 어느덧 '9'를 향해 달려갑니다.

사진=스포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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