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택의 스카우트(11)] 용인대 최원철, 절박함으로 빚어온 '턱걸이 인생'
입력 : 2016.07.23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태백] 홍의택 기자= 막 꽃피우려는 친구들 하나둘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수능으로 대학 간 축구 선수? 시험을 치른다 한들, 당락을 좌우할 만큼 절대적이지는 않다. 수시 전형으로 합격한다면 이 과정조차 무시할 수 있다. 그런데 시험 성적으로 그 과정을 뚫었다. 엄정히 말해 '축구 선수'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행보다.

용인대 3학년 최원철이 그랬다. TO(Table of Organization, 정원)가 없어 다른 길로 돌아갔다. 불확실성 팽배한 데 뚜벅뚜벅 내디뎠다. 스스로 내놓은 표현 '턱걸이 인생'. '저런 길도 있을까' 싶었을 때, 벼랑 끝에 매달려 '이런 길이 있노라' 증명했다. 절박함으로 뿌리 내리고 줄기를 키웠다. 이제는 그렇게 만개하려 한다.




# "축구부라고 하면 일단 무식하게 보잖아요?"
'공부하는 운동부'. 매력이 넘친다. 운동에 목숨 거는 게 아니라, 공부도 병행한단다. 기본 소양을 쌓음과 동시에 리스크를 최소화한다. 은퇴 후 제2 사회화를 매끄럽게 이어가기에 이만한 방도도 없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싶다. 주말 리그 운영 등으로 수업 참가를 늘려왔으나, 형식적 사례가 적지 않다. 못 따라가니 재미 없고, 흥미가 결여되니 잠이 온다. 그래도 괜찮다. 고입에서도, 대입에서도 '공부' 영역은 간과해도 될 정도다. 최원철의 행보 역시 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예외 코스'를 밟지 않았다면 말이다.

"서울 공릉중학교를 졸업했어요. 축구 실력보다는 '공부하는 축구부'로 유명했죠. 시험 기간 때면 운동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공부했어요. 친구들 역시 의지가 강했고요. 또, 감독님이 학교 부장님이셔서 수업에 들어가서 자는 것도 어려웠고, 나중에 성적표도 걷고. 몇 점 이하면 공부를 더 해야 했어요."

축구로 두각을 드러낸 선수는 아니었건만, 장훈고 유니폼을 입었다. 근 몇 년 새 프로 산하 팀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투자를 거듭하며,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1995년생 최원철의 고입 시기만 해도 장훈고는 현재와는 또 다른 아성을 자랑했다(물론 지금도 그 명맥은 이어져 온다).

"아버지가 '잘하는 친구들이랑 같이 공을 찼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장훈고는 제가 가고 싶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거든요. 당연히 스카우트 제의도 없었고요. 그런데 11명이던 TO 중 갑자기 1명이 비어 테스트를 보겠다는 얘기가 들렸어요. 기대했죠. 하지만 그마저도 갑자기 말이 바뀌어서 원래 애가 들어갔어요."

결국 일반 학생으로 입학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내려놓을 법도 했거늘, 보장되지 않은 도박을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관리해온 성적으로 당당히 장훈고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대뜸 이규준 당시 장훈고 감독(현 경기하남축구클럽 감독)을 찾아가 졸랐다. "축구 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이 감독도 OK 사인을 내렸다. 입시라면 모를까, 재학생을 수용하는 과정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시련은 3년 만에 또 찾아온다. 고교 졸업 즈음, 갈 대학교가 없었다. 한국대학축구연맹에 등록된 학교가 80개에 가까웠어도, 원하는 곳에 진학할 수가 보이질 않았다. 주위에서는 용인대를 추천했다. 이장관 용인대 감독도 최원철(당시 남강고로 전학, 경기하남축구클럽 소속)의 존재를 알았다. 하지만 TO가 없어 선뜻 손내밀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순수 입학을 택했다. 마침 공부를 강조한 자율형 사립고 장훈고를 거쳤다. 낮에는 축구 하고, 밤에는 자율 학습하며 그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 주효했다.

"축구부라고 하면 축구 외엔 무식하다고 보는 시각들이 많아요. 그런데 '나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부모님께서 '인생은 축구가 전부가 아니다'라며 공부를 권하신 것도 크게 작용했고요. 대학 입시도 잘 안 풀렸는데, 용인대를 수능 성적으로 입학한 뒤 이장관 감독님을 찾아갔어요. '본교 학생인데, 문제 될 거 없다'고 하셨죠. 저는 예체능 계열이었기 때문에 모두 A형(B형보다 낮은 난이도)으로 응시했고, 국어·영어·수학에서 3~5등급 정도 받았어요."




# "원철아, 이런 책도 한 번 읽어봐"
3~5등급은 어느 수준일까. 대학 축구 선수 여럿이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저희가 보통은 8등급이에요. 잘 찍으면 7등급, 못 찍으면 9등급이고요. 특별하게 준비하면 그 이상도 나오겠지만, 쉽지 않아요". 이에 적잖은 이들이 최원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수능으로 대학 온 축구 선수'란 꼬리표는 분명 예사롭지 않았다.

영어권 국가에서 어학을 공부한 것도, 개인 과외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두뇌가 비상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리고선 "수업 시간에 안 자고 충실하게 했다"며, 남들이 들으면 눈꼴 시려할 말만 되뇌었다. 사실 여기엔 주변인들의 도움이 탄탄히 깔려 있었다.

"담임이셨던 홍은지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치셨어요. 수업 시간에 열심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죠. 축구부 감독님도 '그 시간에 절대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셨고요. 도서관 사서 안인경 선생님이랑도 친해졌어요. 슬램덩크 만화책만 매일 보니까 '그만 좀 읽어. 닳겠어'라고 하시면서 댄 브라운 소설을 추천해주시더라고요. 그때 <천사와 악마> 같은 작품을 시작으로 소설책 부류를 진짜 많이 읽었어요."

독서 습관이 국어 영역 등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이때 쌓은 내공이 밑바탕 되지 않았다면 '용인대 축구 선수' 삶도 없었을 일. 진학 후에도 공부는 계속됐다. 학교 측에서 C+를 하한선으로 잡은 터라 동기도, 선후배도 이를 가벼이 볼 수 없었다.

"저희는 F 나오면 큰일 나요. 이장관 감독님부터 학과 공부를 워낙 강조하시고요. 요새 C학점 이상 안 나오면 경기 출전이 안 된다는 제도를 추진한다고 하던데, 용인대는 원래 그렇게 하고 있었어요."




# "네가 제일 잘해. 나만 믿고 따라와"
본분은 축구다. 축구를 못하면 끝이다. 그랬기에 장훈고 입학 뒤 느꼈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냉정히 말해 개개인에게 맞는 레벨이 있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면 가랑이 찢어지는 법이다.

"자괴감 많이 들었죠. '내가 이거밖에 안 되는구나'. 신입생이 저까지 포함해서 딱 12명이었거든요. 이중 저희끼리 경기하면 11명이 나가야 하는데, 늘 제가 빠졌어요. 후반전에 조금 뛰는 게 전부라 의욕도 없었죠. 수준 차이가 얼마나 많이 났는데요."

초등학생 때 축구를 시작해 프로 무대에 도달할 수치는 0.8%. 피라미드가 위로 향할수록 급격히 좁아지듯, 정상은 소수 몇몇에게만 허락된다. 생존을 거듭한 최후의 승자에게만 대중 앞에 설 자격이 주어진다. 도중 다른 길을 찾는 사례가 지천이라 포기의 유혹은 시도 때도 없이 피어난다.

그렇다고 기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드물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어딘가엔 살아 숨 쉰다. 본인 노력에 주위 환경이 맞물려 폭발하는 경우다.

"하루는 교체 멤버 중 저만 게임 못 들어간 거예요. 진짜 자존심 상했죠. 2분 남기고 투입 지시가 떨어졌는데, 그때 최종삼 코치님(현 진건FC 감독)이 바로 옆에서 속삭이신 말씀이 있어요. '야, 너 지금 저 안에 있는 애들이 잘해 보이냐? 나는 네가 제일 나은 거 같은데. 1~2년 뒤에 봐라. 네가 게임 뛰는지, 쟤네가 뛰는지. 너 할 수 있어. 저런 거에 꿀리지 말라고'. 그날 정확히 1분 뛰고 나왔어요. 볼도 못 만져봤고요. 그런데 머릿속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지금도 대학은 힘들게 왔지만, 팀 내 역할을 맡는 데 뒤떨어진다는 생각은 안 해요. 중학교 때 김연모 선생님께 레슨 받으며 기본기에 충실했고, 고등학교 시절 그런 환경에서 안간힘까지 쓰니 정말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 "우리 용인대학교에서는 없어선 안 될 선수죠"
최원철 얘기를 꺼내자, 이장관 용인대 감독은 몇 번이고 엄지를 내보였다. "최근 3년 통틀어 우리 팀에서 가장 많이 뛴 선수입니다".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다. 4-1-4-1 중 중앙 수비 앞 1자리에 선다. 화려하지 않아도, 팀 일원으로 기능한다. 스피드나 터프함에서 살짝 떨어질 수 있지만, 기본 역할에 매진했다.

하지만 팀 주축으로 자리 잡은 뒤에도 갈증은 여전했다. "느리다"는 말 한마디에 매일 밤 골대에 몸을 묶어놓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가능성 없으면 바로 그만두는 거다"라며 엄포를 놓고도 매 경기 찾아온 부모, 본인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멀어졌을 누나를 위해 묵묵히 땀만 흘렸다.

'수능 성적'이란 다소 독특한 자취로 눈길은 끌었어도, 그 기저에는 절박함으로 자아낸 성실함이 배어 있었다. 경기는 계속 뛰지만, 스스로 갈 길이 멀다며 채찍질하는 것도 그 때문. 지금도 동 포지션을 소화하는 또래를 보면 잘하는 선수들이 그렇게 많단다.

"제가 생각하는 성공요. 나중에 축구 선수 인생이 끝나면 '내가 좀 괜찮았구나' 만족할 수 있는 그런 거? 프로도 가고 싶고, 유명해지면 더 좋겠죠. 그런데 너무 멀리 보면 바로 앞산도 못 넘어요. 머나먼 꿈을 꾸기는 해도,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 다해 가까운 것부터 이뤄내고 싶어요."

"주변 분들께 항상 감사하죠. 이규준 감독님, 이장관 감독님 중 한 분이라도 절 안 받아주셨으면 거기서 끝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불만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어요. 늘 턱걸이 인생이었고, 밑바닥부터 시작했잖아요. 그랬기 때문에 조금씩 올라가도 항상 고맙게 생각했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넘어오니 신세계였고,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넘어오니 또 신세계였어요. 이제는 프로라는 진짜 신세계도 느껴보고 싶지만, 이게 쉬운 게 아니니까요. 프로 진출한 형들이 가끔 연락 와요. '네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올 거다'라고요. 그런데 이것도 다 취업한 뒤 일이니까, 일단은 현 위치에서 더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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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Sun's 축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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