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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풋볼스키] ‘전설의 골키퍼’ 야신, 아직도 안녕하십니까?

기사입력 : 2013.04.26      기사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페이스북 공유


‘러시아 미녀’, ‘보드카’. 이들은 러시아를 수식하는 대표 키워드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이 ‘러시아 축구’다. 최근 유수의 해외 축구 언론을 통해 러시아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출몰하지만 우리는 정작 러시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포탈코리아’가 준비했다. 매주 금요일 ‘풋볼스키’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최신 이슈와 소식을 독자에게 전한다.

바야흐로 ‘골키퍼 르네상스 시대’다. 우리는 늘 화려한 선방쇼로 축구팬들의 눈을 사로잡는 훌륭한 골키퍼들을 눈앞에서 혹은 TV에서 보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한국축구팬들에게는 ‘애증의 팀’이 된 퀸즈파크레인저스의 줄리우 세자르, 레알 마드리드의 안방마님 이케르 카시아스, 유벤투스의 수문장 잔루이지 부폰 등.

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최고의 선수들에게만 수여한다는 ‘발롱도르(올해의 유럽축구선수상)’ 수상자는 없다. 그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져가고 있는 ‘1963년 발롱도르 수상자’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다.

세상에는 완벽한 준비로 이뤄지는 것은 없다. 삶은 어차피 우연과 도전의 연속이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야신 또한 그랬다.

2차 세계 대전으로 전 세계가 혼돈에 빠졌던 1941년. 야신은 독일의 침공으로 12세의 나이에 모스크바 근교의 공장에서 비행기 조립을 하며 노동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에 축구 붐이 다시 일어날 때쯤 야신은 우연치 않게 축구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 야신이 일했던 공장은 실업 축구팀을 만들려 했고 유난히 체격이 좋은 야신이 골키퍼로 낙점된 것. 당시 야신은 그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굳이 내가 축구를 해야 한다면 골키퍼가 아니고 공격수가 하고 싶었다.”

그렇게 축구 선수의 삶을 시작하게 된 야신은 탁월한 점프력과 동물적인 반사 신경으로 이름을 알렸고 1949년 7월 디나모 모스크바에 입단했다. 사실 야신이 처음부터 모스크바 클럽 팀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모스크바는 축구 뿐 아니라 아이스 하키팀(러시아에서 아이스하키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도 운영했었고 이에 야신은 아이스 하키팀의 골키퍼로도 배정됐고, 축구팀 골키퍼와 병행하며 선수생활을 이어간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알렉세이 코미치라는 소련 최고의 축구팀 골키퍼가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야신이 넘어서기에는 무리였다. 실제로 1953년 코미치가 클럽을 떠나기 전까지 야신은 축구팀에서는 그의 백업 요원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야신이 세계적인 선수로 거듭날 수 있었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던 야신은 아이스 하키팀 골키퍼 훈련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훈련 속에 야신은 수비시 각을 좁히는 과정과 조그만 하키 공을 다루는 세밀한 감각까지 익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 기존의 축구 골키퍼가 가질 수 없는 야신만의 무기까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954년. 드디어 야신에게도 기회는 찾아왔고 이를 놓치지 않았다. 코미치가 개인 사정을 이유로 팀을 떠나게 된 것. 코미치의 부재로 주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야신은 금세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주전 골키퍼의 위용을 유감없이 드러내던 야신은 당시 약체로 평가됐던 소속팀을 소련리그 4번의 우승과 2번의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은 대표팀에서도 이어지게 된다. 모스크바의 주전이 된 야신은 1954년 소련 대표팀에 발탁되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그는 1956년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며 오스트레일리아 올림픽에서 대표팀에게 금메달을 안겼다. 이후 그는 1960년에는 제1회 유로60(유로선수권대회) 우승의 주역이 된다.

특히 그가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것은 페널티킥 상황에서의 수비력에 있다. ‘11m 러시안 룰렛’으로도 불리는 페널티킥은 키커와 골키퍼의 숨 막히는 대결이다. 가로 7.32m, 세로 2.44m 크기의 골대 앞에 골키퍼는 서있고, 키커는 골대로부터 11m 지점에 볼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다. 키커가 찬 공이 골라인을 통과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0.4초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골키퍼가 몸을 날리는 데는 약 0.6초. 그렇기에 골키퍼는 절대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야신에게 이는 의미 없는 과학적 근거에 불과했다. 소련 대표팀 소속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그가 막은 페널티킥의 회수는 150회. 총 270회의 페널티킥 상황에서 56%에 육박하는 절정의 ‘슈퍼 세이브’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야신의 이런 독보적인 활약에 한 서독의 기자는 어떻게 하면 페널티킥을 그렇게 잘 막을 수 있느냐고 질문했고 야신은 이렇게 답한다. "사각지대는 그 어떤 골키퍼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난 막을 수 있다."


물론 야신의 위상을 기록과 수치로만 평가하는 것만큼 실례인 일은 없다. 그는 성품마저 ‘전설의 품격’을 드러냈던 선수였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의 일이다. 소련은 서독과 준결승을 치루는 상황이었고 당시 서독의 공격수였던 우베 젤레는 문전 쇄도 중 야신을 발로 가격했다. 충분히 고의성이 다분한 장면이었기에 소련의 선수들은 우베 젤레에게 달려갔고 이에 경기장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됐다. 이때 야신은 훌훌 털고 일어나 오히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소속 팀 선수들을 나무랬고 우베 젤레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이에 경기장에 있던 수많은 팬들은 야신의 이름을 외쳤고 경기는 다시 재개될 수 있었다. 야신의 고품격 성품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이렇듯 야신의 존재는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그것보다 더욱 상상을 초월한다.

구소련 시절 러시아 리그에는 ‘야신 클럽’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리그에서 100 경기 이상을 출전하며 0점대의 실점율을 기록한 골키퍼만이 들어갈 수 있는 클럽이다. 현재 6명의 골키퍼만이 클럽에 들어갔을 정도로 그 문턱은 높기만 했다. 90년대 초반 성남에서 뛰며 실점율 0점대를 자랑하던 신의 손(본명: 발레리 콘스탄치노비치 사리체프, Вале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арычев)도 소련에서 겨우 ‘야신 클럽’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을 정도다.(안타깝게도 신의 손은 이듬해 소련 리그가 해체되는 바람에 ‘야신 클럽’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신상’도 바로 이 야신에서 비롯된 상이다. ‘야신상’은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국제축구연맹이 한 개인의 이름을 따서 수여하는 상이다. 전 세계 최고의 골키퍼들이 모인 월드컵에서 실점율, 슈팅 방어 횟수, 페널티킥 허용률 등을 종합 평가해 수상자를 선정하기에 그 권위가 엄청나다 할 수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수상자: 부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수상자: 카시야스) 야신의 존재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객관적 근거다.

하지만 이별은, 종종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고 했나? 전설의 골키퍼인 야신에게도 은퇴의 순간은 찾아왔다.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장기적인 출장으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한 야신은 1971년 5월 27일 모스크바의 레닌스타디움에서 은퇴경기를 갖게 된다. 당시 최고의 축구 영웅이라 할 수 있었던 펠레, 에우제비오, 베켄바우어 등도 이날 경기에 참가, 경기장을 꽉 메운 10만 명의 관중과 함께 그의 마지막 경기를 함께 했다.

야신은 지난 1990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이어 수많은 스타 골키퍼들의 출현, 잘나가던 소련 리그의 붕괴로 야신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레전드는 죽어도 그 유산과 산물은 오래 남는 법이다. 야신이 충분히 조명 받고 관심을 받아야 할 이유다.

세계 축구 사(史)에 한 획을 그었던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 당신의 기억 속에 야신은 아직입니까?

사진 출처 = 디나모 모스크바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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