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곽민정, “난 부족했던 선수… 코치-심판으로 올림픽 꿈”
입력 : 2019.12.02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수원] 김성진 기자= 지난해 열린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때 한동안 잊고 있던 이가 피겨스케이팅 중계에 나섰다. 시청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쉽게 풀어내며 피겨스케이팅의 매력을 전하고 후배들의 경기는 함께 응원을 보냈다. 2015년 현역에서 은퇴했던 곽민정(25)이었다.

곽민정은 ‘전설’ 김연아(29)를 이을 선수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16세이던 2010년에는 김연아와 함께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 출전해 13위라는 성적을 냈다.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연아가 출전하지 않은 이 대회에서 곽민정은 한국 최초로 동계 아시안게임 피겨스케이팅 메달리스트로 남았다.

하지만 연이은 부상은 곽민정의 성장을 막았다. 부상과 회복을 반복하던 그는 2015년 은퇴를 결정했다. 이후 지도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곽민정을 수원의 한 호텔에서 성황리에 열린 2019 경기도 네트워킹 파티에서 만났다. 곽민정은 이 행사에 곽윤석 홍보기획관 등과 호스트로 참여했다. 현재 안양에서 코치 생활을 하는 그는 시종일관 밝은 미소와 함께 은퇴 이후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 지난해 평창 동계 올림픽 해설을 했다. 그 뒤로 어떻게 지냈는가?
스케이트 관련 일은 변함없이 하고 있다. 링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방송 해설은 시합이 있을 때만 한다. 그 외의 시간에는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이대가 초등학생부터 고교생까지 다양하다.

- 언제 운동을 처음 시작했는가?
9세 때 시작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로는 굉장히 늦게 시작한 경우다. 잘하는 선수는 6세 때부터 시작한다. 그 당시에 지나가다 방학 특강이라고 해서 피겨스케이팅이 있어서 시작했다. 그 뒤 지도해주신 선생님이 계속 권유를 하셨고, 피겨스케이팅을 지금까지 하게 됐다.

- 은퇴한 지 4년이 됐다. 지난 4년 동안 달라진 삶을 잘 보냈다고 보는가?
은퇴 직후 1년 정도는 정신적으로 혼란이 왔다. (은퇴한) 다른 선수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한동안 “난 누구? 여기는 어디?” 이런 느낌이었다. (웃음) 스케이트를 신지 않는 것에 대해 적응을 하지 못했다. 항상 환호를 받다 내려놓으니 아쉬움이 컸다. 사람들 입에 오르고 주목받는 인생을 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현실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적응하는데 1~2년은 걸렸다. 쉬지 않고 코치 생활을 했고 가르치는 선수들에게 내 경험을 전달하면서 극복했다.



- 동시대에 김연아라는 대선수가 있어서 가려진 감이 크다. 비교된 적도 많을 텐데.
사람들이 “만년 2등이라 억울하지 않았냐”라는 말을 많이 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올림픽을 나간 것에 대해 값지게 생각하는데 연아 언니 덕분이었다. 올림픽 출전권을 차지한 것은 나지만, 올림픽에 2명이 출전할 수 있게 한 것은 연아 언니다. 1명만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면 언니가 나가는 것이다. 그런 기회를 얻었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언니 뒤에 가려져서 빛을 못 받았다고 하기에는 언니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다.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다. 나를 비롯한 언니 밑으로 3~4명의 선수는 언니가 키웠다. 다들 언니 뒤를 따라갔다.

- 자신이 생각할 때 선수 곽민정은 어떤 선수였든 것 같은가?
음… 어렵다. 큰 부분만 본다면 대만족 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선수 생활이 100이라면 80이 아쉽다. 올림픽, 아시안게임은 2개의 큰 대회였을 뿐이다. 17년의 선수 생활 하는 동안 조금 더 해낼 수 있었던 것을 놓친 것이 아쉽다. 점수를 더 딸 수 있었는데 놓쳤거나 운동을 더 할 수 있는데 못한 것들이다. 전성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부상당하기도 했다. 아마 모든 선수가 이럴 것이다. 80%는 부족했던 선수 같다.

- 올림픽에서 13위를 했다. 13위라는 성적은 만족했는가?
올림픽에서 쇼트프로그램은 30명이 출전하고 그중 24명만 프리스케이팅에 나선다. 6명이 탈락이다. 사실 올림픽 출전을 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올림픽에 간 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1등 하려고 간 것도 아니었고 꿈에 그린 올림픽에 나갔으니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매우 어린 패기로 출전했고 올림픽을 즐겼다. 올림픽에서 공식 연습을 하면 선수들의 실력이 대략 파악이 된다. 6명은 제칠 수 있을 것 같았다. 24등은 가능할 것 같아서 24등을 목표로 연습했다. 프리스케이팅을 보여주고 오자고 생각했다. 그것이 최종 목표였는데 13등을 했다. 굉장히 만족스러웠고 전혀 아쉽지 않았다.



- 2015년에 은퇴를 결정했던 이유는?
발목을 많이 다쳤다. 은퇴 수순으로 쉬고 있었다. 찬란했던 선수 생활을 회피하듯이 은퇴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쉬다가 대회 출전을 했다. 잘하려고 복귀한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내 마지막 시합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미 몸은 다 망가진 상태였다. 왼쪽 발목인대 3개가 다 끊어졌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는 인대를 다치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대회에서 점프도 안 됐다. 기술을 보여줄 수 없었다. 쇼트프로그램만 하고 마쳤다.

- 은퇴 후 해설위원을 하고 있다. 선수, 코치, 해설 모두 각각의 특징이 있다. 어떤 다른 점이 있었는가?
선수 때는 나만 신경 쓰면 되는데 지금은 내가 아닌 다른 여러 명을 신경 써야 한다. 내 자식도 아닌 아이들에게 목숨을 내줄 듯이 에너지를 쓰는 게 신선했다.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께서도 나를 이렇게 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해설은 너무 재미있다.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도 불러준다면 하고 싶다. 해설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꿈이 내가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다. 은퇴한 뒤 허무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해설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때마침 우연의 일치로 KBS에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1년 뒤 평창 동계 올림픽 해설을 했다.

- 중계석에서 본 평창 동계 올림픽은 어떠했는가?
우리나라에서 했다는 것이 특별했다. 굉장히 축복받았다고 생각했다. 난 올림픽을 선수와 해설로 두 번이나 경험했다. 그래서 내 목표가 내 선수를 키운 뒤 선수와 함께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과 국제 심판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내게는 숙제가 됐다.

- 심판 자격을 취득했는가?
아직 공부하고 있다. 2년 뒤에 시험 보러 외국으로 간다고 하더라.

- 자신이 국내 피겨스케이팅에서 어떻게 기억되었으면 하는가?
(잠시 고민을 한 뒤) 우리나라 피겨스케이팅은 연아 언니를 모두 생각한다. 그 밑으로 지금 유영, 임은수가 있다. 그 선수들은 나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연아 언니와 유영, 임은수 사이에는 중간 다리가 있어야 한다. 나는 연아 언니와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박소연, 김해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 것 같다.

- 베이징 동계 올림픽 때 유영, 임은수가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 보는가?
잘할 것 같은데 러시아 선수들 너무 막강하다. 그 선수들과 끊임없는 경쟁이 되겠지만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는 선수가 나왔다는 것만으로 큰 수확이다. 둘 다 너무 잘한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탄다. 너무 예쁘고 고맙다. 안 다치고 잘했으면 좋겠다.

사진=스포탈코리아, 게티이미지코리아,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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