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토크] <43> 유상철, “책임은 지나 너무 혹독하지 않나”
입력 : 2012.05.11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스타 출신은 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없다. 축구계의 오랜 정설이다. 과거부터 이런 사례가 종종 일어난 탓이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세계 축구의 ‘원톱’이던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은 중동의 한 중소구단을 맡고도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유야 많다. 눈이 너무 높기 때문에 현실과 괴리가 생긴다. “나는 그렇게 뛰었는데, 너희는 왜 못하냐”는 식이다. 경기장 안팎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최고의 전술로 상대를 무찌르기보다는 동기유발에 기대려는 습성도 실패로 이어진다. 홍명보 한국 올림픽팀 감독, 펩 과르디올라 전 FC 바르셀로나 감독과 같은 스타 감독은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대전 시티즌 유상철 감독(41)의 경우도 지금까지의 행보만을 놓고 보면 전자에 가깝다. K리그 11라운드 현재 2승 9패의 성적으로 16개 구단 중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실패에 근접했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작년 7월 승부조작 여파로 낭떠러지 위에 놓인 팀을 맡은 그는 올 시즌 호기롭게 팀을 이끌며 자신감을 나타냈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잔류팀, 강등팀이 나뉘는 스플릿시스템상에서 강등 0순위로 꼽히는 팀의 지도자다. 지난 4월 지역 신문에서 슬그머니 꺼낸 경질설은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한 셈이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에서 “그렇지? 안되겠지? 사람 불러서 바꿔야겠지?”라는 싸늘한 시선으로 바뀌고 있다.

5일 수원전 승리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9일, 대전 유성구 인재개발원에서 마주한 유상철 감독은 몰라보게 핼쑥해진 모습이었다. 얼굴엔 그늘이 졌고 턱 주위에는 흰수염이 보였다. “수원전 승리가 기쁠 줄 알았는데 그날뿐이더라”라며 담담하게 현 상황을 받아들인 그는 경질설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낸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현대 축구 지도자가 ‘파리 목숨’이라 해도 채 날개를 펴기도 전에 작정하고 달려드는 여론이 야속하다며 “축구 감독이라는 게 참 힘든 것 같다”고도 했다. 팀의 수장으로 지휘봉을 놓을 때까지 책임감을 갖겠다는 포부 이면에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한국 축구 레전드 유상철이 있었다.


익숙지 않은 단어 '경질'

대전은 상주, 수원을 제외한 아홉 번의 경기에서 모두 패했다. 무승부가 없다는 이유로 일부 팬은 ‘남자의 팀’이라고 부른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뒤진 팀 여건상 최소 무승부라도 거두고 싶은 게 유상철 감독의 속마음이다. 말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선수들에 대한 기대치를 지나치게 높게 잡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를 토대로 더 잘해야겠다. 이제 서서히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마음을 다잡을 때 하필이면 경질설이 터졌다. 새 대표이사가 오면 경질 여부가 논의될 것이라는 내용이 골자다. 유상철 감독은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이 기사를 클릭. 망치를 얻어맞은 듯한 좌절감을 느꼈다.

- ‘경질설’을 어떻게 접했고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 심경은 어땠나.
가끔 인터넷에 들어간다. 기사도 보고 관련 글도 봤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런 글을 보면 힘들다. 연기자가 아니기 때문에 티를 안낼 수 없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니 위염이 재발했다. 잘 먹지도 못하고 사람 꼴이 아니더라. 지금 당장의 결과만 보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 참 야속하다. ‘도대체 이 팀에는 어떤 감독이 와야 감독을 제대로 뽑았다는 얘기를 들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내가 왜 욕을 먹으면서까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지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분명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일로 인해 팀 분위기가 다운된다. 그게 제일 아쉽다.



- 책임론이 대두되는데.
당연히 성적이 안 좋은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프로팀 감독으로 날 선임했으면 배려라는 게 필요하다. 내가 처음 이 팀을 맡았을 때 승부조작 때문에 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남은 시즌을 정리하는 데에만 소진했다. 그걸 어느 정도 잠재웠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대전만의 팀 색깔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렇게 몰아세우니 너무 혹독한 거 아닌가 싶다. 아직 시즌이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너무 힘들다. 사표쓰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모든 걸 내려놓기에는 너무 무책임한 것 같더라. 이렇게 나가면 내가 나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할 것 같다. 내가 흔들리면 우리 선수들도 흔들린다. 내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 선수 시절에도 안티팬이 있었다.
같은 대표팀에서도 다른 선수를 응원하는 팬이 날 욕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팬들이 날 욕하는 지 알 수 있게끔 정해져 있다. 그때는 그게 신경은 쓰이지만 오래 담아두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에게 잘못 보였다면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보완하고 신경을 쓰면 오히려 내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뛰었다. 감독은 내가 뛰는 게 아니라 11명을 비롯한 전체 선수를 관리해야 하니까 마음대로 안 된다. 선수 때보다 체력적으로는 여유가 있는데 정신적으로는 더 힘든 것 같다.

- 시민구단이기 때문에 힘든 것은 아닌가. 올해 사임한 허정무 전 인천 감독은 시민구단의 애로점에 대해 얘기했다. 정치와 축구를 연계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시민구단 감독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구단을 좌우하려는 사람들이 정말 축구를 아는 사람들일까. 축구를 아는 사람들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 부분이 개선되지 않으면 대전은 매년 똑 같은 팀이 될 수 밖에 없다. ('스포탈코리아': 새 대표이사가 오면 어떤 대화를 나눌 생각인가?) 특별하게 새로운 사장이 온다고 해서 모든 걸 다 들어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는 걸 잘 안다. 선수 선발 권한 및 그와 관련한 책임에 대해선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할 생각이다.

- 감독 계약이 올해까지다. 재계약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대전시, 시티즌 구단이 팀 발전에 대한 부분을 인지하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가능성을 열어둘 것이다. 하지만 프로는 성적이다. 성적이 괜찮으면 (계약이) 연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전을 다른 팀이 보기에 껄끄러운 팀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은 있다. 후반기 분위기를 보고 다음 시즌을 구상해야 한다.



희망을 선물한 수원전 승리

경질설이 활활 불타오를 때 유상철 감독은 수원전 승리로 불의 세기를 줄였다. 시즌 초 6연패, 최근 3연패하며 ‘팬심’까지 잃어가던 찰나에 꼴찌 팀이 1위 팀을 무찌르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5일 수원전에서 벨기에 특급 케빈 오리스의 선제골 및 후반 추가시간 결승골에 힘입어 2-1로 경기가 끝나자 굳었던 유상철 감독은 코칭 스태프와 얼싸 안고 기쁨을 한껏 누렸다. 월드컵 4강 진출을 확정했을 때 이후로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그는 체통을 잠시 내려 놓고 활짝 웃었다. 마음 고생이 심하던 때에 꼭 이겨야 하는 상대를 잡았을 때의 그 쾌락은 짜릿했다. 유상철 감독은 희망을 봤다.

- 최근 상황 때문에 수원전 승리 기쁨이 더 컸을 것 같다.
우리는 올 시즌 리그를 시작하고 홈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한마디로 간절함의 승리였다. 그날 밤 긴장이 풀려서인지 힘이 하나도 없더라. 그 전에는 마음 고생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는데 그날만큼은 편히 잤던 것 같다. 아마 선수들도 그랬을 것이다. ('스포탈코리아': 한편으로는 선수 시절을 함께 한 서정원, 고종수 수원 코치 때문에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 같다.) 승부는 승부다. 끝나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승패가 갈렸기 때문에 표정은 좋지 않더라(웃음). 수원 입장에서 우승을 하려면 우리와의 경기를 잡고 넘어가야 하는 시기였지 않나. 고비를 넘기지 못해서 아쉬울 것 같다.

- 올해 기세등등한 수원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나?
돌이켜보면 작년에는 굉장히 다급했다. 처음 시작해야 하니까 벤치에 서있어도 안절부절 못했던 부분이 있다. 올해에도 과정은 좋았지만 결과가 따르지 않았다. 마음을 비울 필요가 있었다. 수원전 같은 경우는 마음을 내려 놓고 경기했다. 16위 밑으로 내려갈 데가 없다. 이제는 우리가 올라갈 일만 남았다. 압박감, 부담, 잘 하려는 마음 버리고 우리만의 경기를 하자고 생각했다. 선수들도 안 될 경우 부담감도 생기고 짜증이 난다. 선수들에게도 내려 놓으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경기에서도 선수들이 한 명이 퇴장 당한 상황에서도 많이 뛰면서 전체적으로 다 잘해주었다. ('스포탈코리아': 케빈에게 강조한 부분도 똑같나?) 케빈을 일부러 울산전 명단에서 뺐다. 포워드로서 공격 포인트를 못 올리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팀 리듬이 바뀔 수 있다고 주지했다. 조금 자존심을 건드렸다. 결과로 보니 그런 말을 한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수원전 승리가 향후 여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경기 끝나고 나서 나름대로 분석을 한다. 오늘(9일) 오전 미팅에도 선수들에게 장단점을 얘기했다. 우리가 그날 보였던 경기력에는 단점보다 장점이 확연히 많았다. 지금 우리 팀에는 선수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끈끈한 정, 희생정신이 생기고 팀워크도 좋아지고 있다. 자신감을 많이 회복했다는 게 앞으로 일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서서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포탈코리아': 희망이라.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전지훈련에선 체력 훈련과 실전에 집중했다. 뼈대를 잡아주면 선수들이 살을 붙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경기를 치르다보니까 그때부터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라도 그 부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선수들이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축구인이 봤을 때 우리 팀의 경기력이 나쁘지 않다. 선수들의 분위기로 봐도 좋아질 일만 남았다.

- 11일 포항 원정에서 상승세를 이어가야 한다.
수원 경기에선 A 경기력을 보이고 다음 경기에선 B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프로 선수로서 경기력 자체에 기복이 적어야 한다. 수원전을 예로 들어 우리 선수들이 정말 많이 뛰었다. 그래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매경기 그렇게 경기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다시 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스포탈코리아': 절친한 선배 황선홍 감독과의 대결이라 관심이 높다.) 지금 우리 멤버나 선수 구성을 놓고 보면 현실적으로 그 팀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지 생각을 해야 한다. 굳이 이기지 못하면 지지 않는다는 자세로 준비할 생각이다. 수원전 잘했다가 다음 경기에 지면 올라갔던 자신감이 다시 내려올 수 있다. 황선홍 선배가 전화로 경험담 같은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신다. 이번 경기를 앞두고는 일부러 통화를 안 할 생각이다.(웃음)


천하제패를 노리는 유비

유상철 감독은 프로 감독 데뷔 1년 만에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었다. 열악한 재정 상황 속에서 알짜배기 선수를 영입하려 매일 밤마다 자료와 싸웠다. 강팀과의 경기에서 승점 1점을 따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 중에는 대패도 있었고 짜릿한 승리도 있었다. 그에 따른 훈장을 받았으니 ‘급노화’다. 작년 6월 부임 당시만 해도 광채를 뽐내던 그의 외모는 전형적인 K리그형 감독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외모에 관심 많던 그도 거울을 보고 한숨을 쉴 지언정 그 과정을 후회하지 않고 있다.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통해 지도자 유상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수원전 승리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막 감독의 눈을 뜬 ‘유비’는 천하제패를 위해 달린다.

- K리그가 1/3 지점을 지났다. 시즌 전 “나만의 색깔을 입히겠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 색칠을 했나?
일단 저희 팀에 맞는 팀 색깔을 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더 좋은 축구를 하기가 버겁다. 어떤 발전 가능성이 눈에 확 보이게 하는 것도 중요한데, 조금씩 좋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부분들을 선수들에게 강요하고 훈련을 통해서 색깔을 내면 대전이라는 팀이 다른 상대하고 경기를 하기에 껄끄러운 팀이 될 것이다. 작년하고는 비교하자면 확실히 많이 바뀌었다. 선수가 절반 이상 바뀌고 나서 처음에는 애를 먹었는데 지금은 패스 연결이 전개되는 부분이 좋아졌다. 시즌을 마치고 평가해달라.



- 6월이면 프로 감독 데뷔 1주년을 맞는다. 감독 유상철은 어떻게 변했나?
우선 외모적으로 많이 변했다(웃음). 부임 초기에 탱탱하고 젊었다. 지금은 없던 주름도 생기고 탈모도 오고 흰 수염도 난다. 선수들에게 농담으로 너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 사진으로 비교해보라고 하니 웃더라. 경기장 위에선 어떤 축구를 할 지 아니까 그 색깔을 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우유부단하게 지도하면 선수들도 헷갈려 한다. 선수들을 끌고 가는 방법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차츰 내공이 쌓이는 것 같다. ‘이렇게 1년이 지났구나’ 하면서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한다.

- 선수 때 많은 감독을 거쳤다. 직접 감독이 되니 어떻게 다른가?
선수 때 감독님 말씀을 잘 듣는 편이었다(웃음). 그때는 어느 팀을 가든 내 주장이 있더라도 분명 감독이 원하는 축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감독이 주문하는 대로 뛰기 위해 노력했다. 감독이 되고 나니 예상보다 많이 힘든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훈련, 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회성도 있어야 한다. 다방면에서 활약해야 한다는 점이 가끔은 스트레스로 작용할 때도 있다. 물론 비슷한 점도 있다. 선수 때나 감독이 되어서도 킬러 근성은 남았다. 이기는 것에 희열을 많이 느낀다. 내가 그린 그림이 현실이 될 때 뿌듯함 뭐 그런거다. 수원전 첫 골 때도 그런 느낌을 가졌다. 왜, 축구 오락에서도 원하는 플레이가 잘 안될 때가 있지 않나. 이게 바로 선배 감독들이 느끼는 감독 맛인가 보다.

인터뷰=윤진만 기자
사진=이연수 기자, 대전 시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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