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토크] <47-1> 정인환, “허정무 감독이 그만두라 해 한 달 울었다”
입력 : 2012.11.21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첫인상은 일종의 오해다.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틀릴 때도 있다. 고백한다. 기자도 지난 2월 한 선수를 오해했었다. 인천 유나이티드 주장 정인환(26)을 중국 광저우의 한 귀퉁이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형이 한 5명쯤 있는 집에서 자란 거친 수비수일 거로 생각했었다. 완벽하게 틀렸다. 인천의 부주장 안재곤은 “우리 둘 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외동아들이다. 그래서 친해졌다”라고 귀띔했다.

털어놓을 게 하나 더 있다. 이것은 여러분도 공감하는 부문일 거다. 정인환이 인천 유나이티드의 엄청난 상승세를 이끈 뒤 대표팀(잠비아 친선전)에 소집됐을 때, 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일거라고 봤다. 아니다. 정인환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을 뿐, 2006년부터 대표팀에 선발됐었다. 그의 표현대로 “살짝 다녀 갔던”것 뿐이다.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무지는 죄악이 아니다. 무지를 깨닫고 제대로 알아가면 된다.

걱정할 것도 없다. 정인환은 새초롬한 보통 외동아들이 아니다. 시원시원하다. “나는 막 컸다”라고 운을 뗀 뒤 서슴없이 축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화끈하게 들려줬다. 눈물도 많고, 포기 충동도 많이 느꼈고, 짧은시간에 롤러코스터도 많이 탔던 ‘국가대표’ 정인환의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두 번째 만난 최강희의 “고맙다”
잠비아와의 친선경기를 시작으로 4번 연속으로 대표팀에 들어갔다. 예상했었나?
사실 평생 기회가 없을 줄 알았다. 최강희 감독님이 2006년에 나를 뽑았지만, 내가 못해서 전남 드래곤즈로 트레이드(2008년, 강민수와 맞교환) 됐었다. 사실 전북만 만나면 죽어라 뛰었었다. 못 보여준 것을 다시 보여주고 싶었다. 골도 2골이나 넣었다. 이흥실 선생님도 “넌 전북만 만나면 미친놈 같다”라고 했을 정도다. 진짜 그랬다. 내 진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 전북에서 은퇴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다시 만나니 꿈만 같았다. 최 감독님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다.

다시 뽑은 정도가 아니다. 이란과의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는 곽태휘와 함께 중앙 수비를 봤다. 결과적으로 져서 아쉬웠겠지만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를 앞두고는 불러서 ‘실망하지 마라. 벤치에 앉을 거다. 그래도 희망은 계속 가져가라’라고 했었다. 이란전 때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경쟁이라고만 했다. 기사로만 내가 유력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 훈련 때 주전의 상징인 조끼를 줬다. 사실 죽어라 뛰면서도 경기 당일 다른 선수가 들어갈 줄 알았다. 워낙 그런 일을 많이 겪었다. 이번에도 설마 했는데 명단에 내가 들어갔더라. 명단 나오기 전까지가 더 긴장됐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결과가 아쉬웠다. 경기를 잘 풀다가 어이없는 실점으로 패했는데
대표팀에 오면 결과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올 때는 기쁘지만, 긴장도 많이 한다. 이란전에서는 다 좋았는데 골대 2번 맞추고 마음이 급해졌던 것 같다. 실점 장면도 지금 다시 봐도 두 번 연출되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리고 이란 관중 거의 10만 명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데 정말 놀랐다. 옆에서 (곽)태휘 형이 “집중하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쉬운 경기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각보다 대표가 빨리 됐던 것 같다
가서 몸만 풀다 왔다. 2006년에 처음으로 갔다. 그때는 준비가 안 돼 있었다. 당시에 상당히 자만했었는데도 ‘내가 가도 되나?’라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주위에서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경기에 못나가니 어린 마음에 감정 컨트롤이 안됐다. 결국 실력도 많이 늘지 않았다. 사실 17세, 19세, 20세 그리고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계속 몸만 풀었다. 대표팀 다녀오면 흐름이 깨지고, 돌아가서는 더 못하고 그랬다. 실력이 될 때 대표팀에 뽑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언제 자신감이 좀 붙었나?
2006년에 전북에 와서 바로 엄청나게 큰 부상을 당했다. ‘무식하게’ 헤딩을 하다가 안면 골절을 당했다. 광대뼈가 귀에 가 있었고, 턱뼈도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10대나 맞고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평생 할 욕을 혼자 다 한 것 같다. 복귀 후에는 파리도 무서울 정도였다. (웃음) 축구를 그만두려고 했다. 홍명보 감독(당시 아시안 게임 코치)님이 잡아 주셔서 계속 운동을 하긴 했는데, 별다른 걸 보여주지 못했다. 전남 이적 후에도 첫 해에 부상당하고 좋지 않았다. 2010년에서야 조금 달라진 것을 느꼈다. ‘이제는 대표팀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기회가 없었다. 잘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봤다. (편집자주: 부상과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일화는 2편에서 자세히)

최강희 감독과의 재회에는 특별한 게 없었나?
감동을 한 일이 있다. 최 감독님이 방으로 불러서 면담했다. “고맙다”라고 했다. “2008년에 그렇게 보냈는데 다시 뽑을 수 있게 해줘서, 크게 성장해줘서 고맙다”라고 하더라. 부끄럽게도 말씀에 감동해서 거의 울뻔했다. 감사한 건 나다. 내게 다시 기회를 줬다.

“축구에 재능 없다고, 그만두라고 해서 한 달 내내 울었다”
옛날 이야기를 좀 해보자. 어렸을 때부터 각급 대표팀에 많이 드나들었다고 했는데, 남들과는 축구를 시작한 게 조금 다른 것을 알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태권도를 했다. 중학교에서는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다니던 포곡 중학교는 축구부가 없었다. 태성 중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는데 같은 지역이라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시청에 찾아가 무릎 꿇고 ‘아들 축구 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어렵게 전학을 갔다. 사실 축구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안 된다고 했다. 태권도 계속하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 통하길래 가출했다 일주일 정도 몰래 옆집에서 잤다. 뒷문으로 다니고 그랬다. 그래서 허락을 받아냈다.

운동을 늦게 시작했다. 여러 가지로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축구 시작하고 일주일 만에 어머니께 못하겠다고 했다. 구타도 너무 심하고,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어머니가 안 된다고 했다. 회비 냈으니 무조건 하라고 했다. 그래서 했다. (웃음) 결국 중학교 2학년 말이 다 돼서 정식으로 시작했다. 경기에 못나갈 수밖에 없었다. 입지가 정말 좋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다 고등학교도 결정된 상태였는데 난 잘하는 친구 따라서 태성 고등학교에 가야 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당시 창단했던 용인 축구센터에 몰래 입단 테스트를 신청했다. 당시 허정무 감독님이 총감독으로 있었는데 어떻게 시험에서 붙긴 붙었다. 체격과 점프력 덕을 봤다. 25명을 뽑았는데 내가 25번째였다. 그런데 학교에 가서 감독님께 이야기하니 안된다고 했다. 당장 짐 싸서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갔다. 결국 용인 축구센터를 포기했는데, 용인 축구센터의 박광현 코치님이 학교에 찾아와서 이야기를 해줬다. 결국 6개월 동안 일반 학생처럼 학교 다니다가 백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태권도도 잘했다고 들었는데, 왜 축구가 하고 싶었나?
축구 선수가 멋있어 보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보면서 ‘저거 해야겠다’라고 결심했다. 태권도도 부모님께서 모두 맞벌이하고 저녁 11시에 돌아와서 시작한 거다. 태권도 하면 저녁도 주고 10시에 집에 데려다 줬다. 속셈, 피아노 등 여러 가지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네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라고 한다.

용인 축구센터에 들어가서는 평탄했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설레는 마음으로 첫 전지훈련을 갔다. 장소는 중국이었고 기간은 한 달 이었다. 첫날 경기에서 나 때문에 6골 먹었다. 그것도 후반에 교체로 들어간 거다. 허 감독님이 경기 끝나고 냉정하게 “다른 길을 찾아봐라. 넌 축구에 소질 없다”라고 했다. 뭔가 보여주려 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 달 내내 울었다. 그 이후로는 거의 못 뛰었다가 한 경기에 들어갔는데 내가 페널티킥을 내줘서 졌다. 허 감독님이 “넌 자격이 없다. 돌아가면 다시 생각해보라”라고 말했다. 화내는 게 아니라 충고였다.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께 축구 못하겠다고 했다. 진지했는데 어머니는 학비 냈으니까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1년만 죽어라 해보기로 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 연습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이 됐고, 경기를 뛰었는데 괜찮았다. 허 감독님이 부르더니 “너 쥐약 먹었냐? 오늘이 가장 잘한 것 같다”라고 했다. 충격이었다. (웃음) 그 이후로도 열심히 했다. 나중에 허 감독님이 17세 대표팀 감독님에게 나를 추천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표팀에도 갔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때 허 감독님에게 혼나지 않았으면 지금의 축구선수 정인환은 없다. 허 감독님은 나를 축구선수로 만들어준 분이다.

처음 가본 대표팀은 어땠나?
집에 와서 어머니께 파주 간다고 하니까 “왜?”라고 물었다. “네가 왜 가?”라길래 대표팀에 뽑혔다고 설명했다. 가서도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이강진과 이상협이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 친구들은 축구를 했었고 나는 태권도를 했었다. 파주에서 오랜만에 만난 거다. 그 친구들이 “왜 왔냐?”라고 묻더라. 설명을 했는데 “거짓말 마”라며 안 믿더라. 같이 밥 먹으면서도 내가 견학 온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운동장에 대표팀 옷 입고 나가니까 그때서야 “진짜구나”라며 인정했다. (웃음)

2편에서 계속(11월 22일 출고 예정)

인터뷰= 류청 기자
사진= 이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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