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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역사

1970s제 9회 월드컵은 '태양의 나라' 멕시코에서 열렸다.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아르헨티나가 1970년 대회 개최를 강력히 희망하며 로비 활동을 벌였으나 결국 개최국은 멕시코로 결정됐다. 그런데 멕시코는 국토의 대부분이 고지대이면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나라였기에 대회 개최에 의문을 재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결국 멕시코시티와 같은 2.240m의 고지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건 이 때가 사상 처음이었기 때문에 FIFA는 대회를 앞두고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당시 FIFA 순회 코치인 서독의 데트마르 크라머를 중심으로 의료진, 심판진 등이 각 부문에 걸쳐 심도 있게 논의를 진행했고 스웨덴 의료진이 "경기 중 선수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하라"는 제안을 해 FIFA가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매 경기 각 팀에서 2명 씩 선수 교체를 할 수 있게 했고, 옐로우 카드와 레드 카드도 정식으로 도입됐다. 이 대회 결승전은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대결로 치러졌는데 어느 팀이 이기더라도 월드컵 3회 우승으로 줄리메컵을 영구 보유할 권리를 갖는 의미있는 시합이었다. 결국 축구황제 펠레를 앞세운 브라질은 이탈리아를 4-1로 누르고 통산 3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줄리메컵을 영구 보유하게 됐다. 한편 이 대회는 국내 축구팬들도 텔레비전을 통해 시청할 수 있었다.

제 1회 우루과이 대회 이후, 우승팀에게 주어졌던 줄리메컵은 FIFA 규정에 의해 1970년 멕시코 대회에서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한 브라질이 영구 보유하게 됐고, 1974년 서독 대회 때부터는 컵 이름이 'FIFA 월드컵'으로 바뀌었다. 그 해 6월에 열린 FIFA 총회에서는 브라질의 주앙 아벨란제가 제 7대 FIFA 회장으로 선출됐는데 유럽 국가 외의 인물이 회장을 맡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1974년에 치러진 서독 대회는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2차 리그제가 도입됐다. 16개국을 4개 조로 나누어 1차 리그를 벌인 뒤 각 조 1, 2위 팀이 2차 리그에 올라 다시 4개국 씩 A조(1조, 3조 1위팀과 2조, 4조의 2위팀), B조(1조, 3조 2위팀과 2조, 4조 1위팀)로 나눈 다음에 팀 당 세 경기 씩 치룬 후, 조 1위 팀이 결승전에 진출하는 특이한 방식이었다. 이 대회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대회 개최국이었던 서독이었으나 더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준우승을 차지한 네덜란드였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 대표팀이 구사한 '토탈 사커'가 대단히 획기적이고 미래 지향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끈 감독은 리누스 미셸이었다. 미셸 감독이 추구한 토탈 사커는 "선수들이 자유롭게 포지션 체인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싱을 걸어서 상대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다. 즉 단순히 전원 공격, 전원 수비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셸 감독은 이 전술을 '프레싱 사커'라고 표현했지만 당시 축구 기자들이 '토탈 사커'라는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선수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개최는 12년 전인 1966년에 결정됐다. 지난 서독 대회 때와 같은 방식으로 치러진 이 대회에는 네덜란드의 슈퍼스타 요한 크루이프가 참가하지 않았다. 크루이프는 유럽 지역 예선 때까지만 뛴 후 대표팀을 은퇴했다. 뿐만 아니라 전대회 서독 우승의 주역인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도 대표팀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기존의 대회 때 보다 전체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졌다. 하지만 우승을 노리는 개최국 아르헨티나로서는 행운이었다. 1934년 대회 때 이탈리아 대표팀이 그랬듯이 독재 정권 하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대회에 나선 아르헨티나 대표팀에게도 우승은 숙명과도 같았다. 결승전은 1978년 6월 25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리버 플레이트 스타디움에서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의 대결로 치러졌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대회에서 네덜란드에게 0-4로 대패한 바 있기 때문에 이날 결승전에서 설욕을 다짐했고, 마침내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 성공한다. 아르헨티나 우승의 일등 공신은 대회 MVP와 득점왕(6골)을 동시에 수상한 마리오 캠페스였다. 월드컵 우승팀에서 단독으로 득점왕이 탄생되기는 캠페스가 사상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