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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리메컵의 역사

월드컵 우승 트로피는 어떻게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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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우승 트로피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줄 리메는 프랑스 출신의 변호사였다. 그는 당시 유럽에 만연해 있던 전투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스포츠에 의해 완화될 수 있다는 신념을 지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그 배경에는 스포츠가 평등함, 공정함, 자유로움이 살아 숨 쉬는 가치중립적인 청정지역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04년 5월 21일 프랑스 파리에서 네덜란드, 덴마크, 벨기에, 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등 7개국이 모여 국제축구연맹(FIFA)를 창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줄 리메는 자신의 조국에서 국제적인 스포츠 단체가 탄생했다는 점에 매료됐고 1910년 프랑스 최초의 축구 리그를 창설하고 회장을 역임하면서 축구와 첫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축구에 대한 줄 리메의 믿음과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당시 장교로 참전해 프랑스 무공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던 줄 리메는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 기간에 영국과 독일 병사들이 축구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지켜봤고 이는 축구에 대한 그의 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종전 후 1919년 프랑스축구연맹(FFF)을 창설하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한 줄 리메는 2년 뒤 1921년 국제축구연맹의 제3대 회장에 오르며 "축구야말로 계급이나 인종의 구분 없이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세계를 행복한 한 가족처럼 단합시켜 줄 것"이라는 취임사와 함께 화해와 평화의 씨앗인 축구의 보급과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다.
1. 갈등 속 지구촌, 축구로 하나되다
사실 당시 국제대회로서 올림픽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줄 리메는 스포츠에서 아마추어리즘을 강조하는 올림픽의 이념 자체를 사회적 차별이라고 간주했고 많은 프로축구팀을 보유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도 그의 뜻에 동의했다. 결국 각국의 공감대를 얻어 내는 데 성공한 줄 리메는 1926년 국제축구연맹 총회에서 월드컵 개최를 결정했고 마침내 명실상부한 최고의 축구축제가 열리게 됐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제1회 월드컵 개최지 선정이었다. 오랜 고심 끝에 줄 리메는 1929년 국제축구연맹 총회에서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축구에서 2연패를 기록하고 대회가 열리는 해인 1930년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루과이를 첫 번째 개최지로 결의한다.

그러나 실제 대회가 열리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유럽국가들의 상당수가 참가 불참의사를 밝혔고 고국 프랑스에서조차 불참 여론이 비등했지만 줄 리메가 각국 클럽과 선수들을 적극 설득한 끝에 유럽 4개국, 미주 9개국 등 총 13개 국가가 예선 없이 초청 형식으로 참가하며 제1회 월드컵의 막이 올랐다. 프랑스에서 승리의 여신이 새겨진 '줄 리메컵'을 직접 품에 안고 우루과이행 배에 올라탄 그의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 개최국 우루과이는 1930년 7월 13일 혁명기념일을 맞은 프랑스에게 개막전을 양보하며 월드컵의 창시자인 줄 리메의 업적과 노고를 기렸다.
2. 줄 리메를 향한 엇갈린 시선
이후 줄 리메는 1954년까지 무려 33년 동안 국제축구연맹 회장으로 역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국제축구연맹은 회원국이 85개국으로 늘어났고 그 만큼 영향력도 막대해졌다. 그 결과 줄 리메는 국제축구연맹 역사상 최초로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는 영광을 맛본다. 그러나 화려한 업적과 경력과 달리 개인적인 이면을 돌아보면 줄 리메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줄 리메는 1934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2회 대회에세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무솔리니의 축구 정치화를 방치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심지어 그가 파시즘에 공감하는 정치적인 인물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마저 나돌았을 정도였다.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당시 명 심판으로 유명했던 랑제뉘는 줄 리메와 이탈리아의 행보를 두고 "스포츠를 통한 인간성의 순수한 승화를 외면하고 말았다"라고 꼬집었다.

1938년 제3회 월드컵은 출발 전부터 삐걱거렸다. 개최지 선정을 둘러싸고 치열한 대립 끝에 보이코트 사태까지 빚어진 것. 당시 대회 유치 경쟁에는 프랑스와 아르헨티나가 유럽과 남미를 각각 대표해 팽팽히 맞선 가운데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총회에서 프랑스가 개최지로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FIFA 회원국의 대다수가 유럽국가였고 프랑스 출신 줄리메 회장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월드컵 유치에 실패한 아르헨티나는 강력히 반발하며 출전을 거부했다.

여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3회 프랑스 월드컵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룩지고 말았다. 스페인은 내전에 시달리며 대회에 나설 수 없는 상황에 빠졌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유럽에 전운이 가득했던 것. 독일에 강점된 오스트리아는 예선을 통과하고도 본선에 참가할 수는 비운을 맛봤다. 줄 리메 역시 독일의 나치식 거수 경례를 그대로 방치했다며 제2회 이탈리아 월드컵에 이어 또 다시 정치색에 관련한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실제 줄 리메는 1956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의 기쁨은 누리지 못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줄 리메가 수상하지 못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과거의 행적에 기인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줄 리메는 자신은 현실 정치를 멀리한 소신 있는 민주주의자였다고 말한다. "축구를 통해 사람들은 가슴에 증오와 비난을 품지 않고 서로 신뢰하며 만날 수 있다"라는 말을 남긴 채 1956년 파리 인근 쉬레네 교회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