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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의 축구환상곡] 델보스케의 스페인이 제로톱 전술에 집착하는 이유

기사입력 : 2012.06.19      기사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미투데이로 보내기  네이버 북마크  구글 북마크  페이스북 공유  사이월드 공감

사진=ⓒBPI/스포탈코리아
사진=ⓒBPI/스포탈코리아

[스포탈코리아] 제로톱 전술의 위대함이 드러난 경기였다. 비센테 델보스케 감독이 호언장담했듯 제로톱은 스페인의 고집이 아닌 필승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스페인은 8강 진출 옵션에 담합은 없었다. C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비기기만 해도 8강에 오를 수 있었던 스페인은 정규 시간 종료 1분을 남겨두고 기어이 크로아티아에게 악몽을 선사하는 결승골을 집어 넣었다. 스페인은 18일 새벽(한국시간) 아레나 그단스크에서 열린 ‘UEFA 유로2012’ C조 3차전에서 크로아티아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스페인과 크로아티아와의 경기는 묘하게 2년 전 한국전을 연상케 했다. 스페인에 대회 두 번째 승리를 안긴 것은 세비야 윙어 헤수스 나바스였다. 당시 플랜B를 시험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피지컬 축구에 고전한 스페인은 경기 종료 직전 나바스에 A매치 데뷔골로 1-0 신승을 거둔 바 있다. 이날 경기에도 크로아티아의 적극적인 전진 압박과 쉴새없는 움직임에 고전하던 스페인은 ‘나바스 카드’를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부상으로 다비드 비야를 잃은 델보스케 감독은 페르난도 토레스와 페르난도 요렌테라는 두 걸출한 타깃형 스트라이커를 보유하고도 ‘제로톱’을 주 포메이션으로 가동했다. 전방에 고정된 기둥을 세워놓고 플레이를 만들어가는 4-2-3-1 포메이션은 끊임없이 움직임과 짧은 패스를 무기로 삼는 스페인에게 첫 번째 옵션이 될 수 없었다. 전방의 모든 지역을 커버할 수 있는 비야가 없다면 스페인은 차라리 스트라이커를 쓰지 않는 편을 택했다.

▲ 크로아티아의 압박을 해제한 나바스 카드

아일랜드와 2차전에 페르난도 토레스를 선발 출전시켰지만 경기 도중 토레스를 대신해 투입된 것은 또 다른 스트라이커 요렌테가 아닌 ‘가짜 9번’ 세스크 파브레가스였다. ‘진짜 9번’ 토레스도 두 골을 기록했지만, 파브레가스 역시 2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며 제로톱 전술의 득점력에 대한 의구심을 일축했다. 크로아티아와 3차전에서도 토레스가 선발로 나섰지만 승부수는 ‘제로톱’이었다.

팽팽한 0-0의 균형이 이어지던 후반 15분, 토레스가 끝내 득점에 성공하지 못하고 그란운드를 빠져나왔다. 델보스케 감독은 스페인 팬들의 원성에도 ‘제로톱 전술’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토레스를 대신해 투입된 것은 스페인 대표팀에서 가장 직선적인 플레이를 구사하는 나바스였다. 스페인의 중원에 배치된 선수들 모두가 중앙과 측면, 문전을 활발히 오가며 컨트롤와 짧은 패스, 스루 패스에 집중하는 반면 나바스는 사이드 라인을 따라 달리는 것을 즐긴다. 물론 문전으로 파고들어 득점할 수 있는 능력도 갖췄다.



스페인의 벤치에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차비 에르난데스와 더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출 수 있는 페드로 로드리게스도 있고, 중원에서 컨트롤 능력이 이들 못지 않은 후안 마타와 산티 카소를라도 대기하고 있었다. 토레스의 위치에 그대로 투입될 수 있는 요렌테도 존재한다. 나바스를 투입한 이유는 중앙에 밀집된 크로아티아 선수단의 간격을 벌리기 위해서다. 스페인은 힘과 높이를 앞세운 크로아티아와 중원 싸움에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측면으로 넓게 벌려 빠르게 움직이는 나바스를 따라가기 위해 크로아티아의 레프트백 스트리니치와 미드필더 프라니치, 부코예비치는 전열에서 이탈해야 했다. 이때부터 체력의 열세는 크로아티아 쪽에 더욱 가중됐고, 스페인의 중원에 숨통이 틔였다.

"중원에서 위협을 느꼈다. 크로아티아 선수들 키가 크기 때문이다. 우린 오른쪽에서 깊이가 필요했다. 헤수스 나바스로 수비를 무너트리고 싶었다. 그가 실바보다 쌩쌩했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는 결국 프라니치와 부코예비치를 빼고 페리시치와 에두아르두를 투입해 4-4-2 전형으로 변화를 시도해 공격과 수비 모두를 강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바스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체력적으로도 전반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크로아티아는 시간이 갈 수록 많은 공간을 허용했다.

▲ 스페인의 결승골, 제로톱 전술이 낳은 예술 작품

나바스의 투입으로 오른쪽 공격수를 맡고 있던 다비드 실바가 가짜 9번 역할을 맡았다. 유로 예선 스코틀랜드 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가짜 9번 역할을 수행했던 실바는 체력적으로 힘겨워 보였다. 델보스케 감독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후반 28분 실바 대신 파브레가스를 투입했다. 그리고 제로톱 전술이 결승골을 만들어 냈다.

기존의 상식대로 라면 공격 전개 상황에 최전방에서 상대 센터백과 경합하고 있어야 할 파브레가스가 2선으로 빠졌다. 그리고 2선에 있어야 할 이니에스타와 나바스가 전진했다. 크로아티아의 포백 라인은 이들의 계속된 위치 이동으로 인해 표류했다. 최전방의 버팀목이 없는 대신 스페인은 중원에서 더 다양한 움직임과 패스 루트를 찾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더욱 많은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스페인의 중원에 이미 차비와 사비 알론소 같은 선수들이 존재하며, 좌우 풀백도 전진하고 있던 상황이기 때뭉네 파브레가스는 완전히 자유롭게 공을 소유하고 패스를 뿌릴 수 있었다. 후반 44분 파브레가스가 볼을 잡고 로빙 패스를 시도하는 순간 스페인의 모든 선수들은 그 어떤 견제도 받지 않고 볼을 이어 받고 움직일 수 있었다. 파브레가스의 패스 루트 선택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던 나바스 대신 이니에스타를 정확하게 택했고, 이니에스타는 배후로 빠져든 뒤 무인지경의 나바스에게 다시 볼을 넘겨줬다. 영리하고 이타적이며 단호한 협력 플레이가 예술 작품 같은 골로 귀결됐다. 델보스케가 고심 끝에 꺼내든 두 장의 교체 카드가 적중했다.

만약 전통적인 원톱이 배치된 상황이었다면 상대 센터백의 전담 마크와 집중 견제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짜 9번은 여기서 자유롭다. 가짜 9번을 보좌하는 두 명의 측면 공격수 역시 전후 이동이 활발하다. 이들은 풀백과 센터백의 사이 공간을 대각선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대응이 쉽지 않다. 이들을 전담 마크할 경우 가짜 9번이 파고들 공간을 허용하게 된다. 진짜 9번이 존재하는 공격진은 지역 방어와 대인 방어의 혼용으로 틀어막기가 가능해 상대의 공격 속도를 지연시킬 수 있지만 제로톱 전술은 반응이 어렵다. 제로톱의 집중은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다.



▲ 스페인의 연금술사, 델보스케는 고집불통이 아니다

시간 지연을 위해 투입된 세 번째 교체 카드는 알바로 네그레도였다. 스페인 팬들이 애타게 부르짖는 정통형 스트라이커 요렌테는 이런 상황에도 선택 받지 못했다. 하지만 델보스케가 요렌테를 외면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그가 필요한 순간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델보스케가 제로톱 전술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가 철학을 고수하는 ‘고집불통’이어서가 아니라 아직 제로톱의 한계와 약점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된 시도는 발전을 낳고 있다. "우린 오늘 좋은 발전을 보였다. 동기부여도 확실히 됐다. 우리의 철학과 스타일이 모두 좋았다. 오늘 경기에서 그걸 입증했다."

요렌테는 스페인 제로톱 전술의 가장 분명한 플랜B다. 델보스케가 요렌테를 대표팀에 선발한 이유도 그래서다. 신중한 남자 델보스케는 직석적인 선수 나바스 카드를 통해 크로아티아전 국면전환에 성공했듯, 제로톱이 한계를 보이는 순간 요렌테 카드를 비장의 무기로 내세울 것이다. 터프함과 기술력을 동시에 갖춘 프랑스와 독일 수비진은 스페인의 제로톱이 시험대에 오를 만한 순간이 될 것이다.

물론 제로톱으로 충분히 공략이 가능하다면 끝내 요렌테에게 기회가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요렌테를 쓰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지든, 요렌테 카드를 꺼내들게 되든 스페인은 승리 방정식이 다양하다. 수 많은 대안을 고민하는 델보스케의 스페인은 끝내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토너먼트에서 경기력 유지는 매우 어렵다. 상대가 누구든지 상관 없다. 누구와 만나든지 대응할 수 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 나선 델보스케 감독이 호기롭게 말했다.

스페인 축구의 아름다움은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축구일 뿐 아니라 전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축구이기 때문이다. 기술도 정점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훈련과 준비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다. 스페인 축구가 보이는 천재성은 노력의 산물이다. 스페인축구협회는 델보스케와 2014년 브라질 월드컵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은 특권이지만,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데리고 세계 최고의 팀을 만드는 것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페인 축구가 강한 이유는 단순히 좋은 선수들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이 좋은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규합시켰으며 항상 대안을 준비하는 델보스케 감독의 지도력과 용병술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여전히 제로톱 전술은 논란을 낳고 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전에서 고전한 전반전의 스페인이 사용한 전술은 제로톱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전의 돌파구가 제로톱이었다. 논란이 뒤따르는 이유는 아직 제로톱 전술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델보스케는 "독일은 9점이지만 우리는 아직 7점"이라는 말로 팀이 만들어지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스페인의 제로톱이 10점에 도달해 모든 논란을 일축하며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글=한준 기자
사진=ⓒBPI/스포탈코리아
그림=크로아티아-스페인 후반전 포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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