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PR' 박지성의 역설, 실패했기에 위대했다
입력 : 2013.05.11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박지성은 한민족 스포츠계의 자랑스런 아이콘이다.

한국축구 해외파 '원조' 레전드 차범근이 독일 분데스리가를 통해 한국인들의 가슴에 와닿았던 것처럼 박지성은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를 통해 '대한민국'의 자긍심과 '대한민국' 축구의 우월함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박지성이 처음부터 잘 나가던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명지대 축구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테니스부의 티오가 한 장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축구 선수가 아닌 테니스부 빈 자리를 빌어 대학 입학에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 축구계에서 당당하게 '엘리트'라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떠돌던 박지성을 국가대표팀에 선발해 한국 무대를 넘어 유럽에서도 스타 플레이어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인공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었다.

거스 히딩크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축구 명문에 속하지 않는, 변두리일 수 있는 명지대를 거쳐 '교토 퍼플 상가'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을 월드컵 대표팀 멤버로 소집했다. 그것도 한국에서 개최되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주전 멤버로 소집한 것이다.

리스크를 회피하고 싶은, 관습에 사로잡혀 있는 지도자에게서는 나오기 힘든 결정이었다. 고려대와 연세대의 연줄 축구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축구의 풍토에서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천우신조'에 가까운 행운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쉽게 잊을 수 없는 2002월드컵 '4강 신화'가 끝난 12월 박지성은 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한다. 2002 월드컵에서 보였던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서였다. 우리 땅에서 벌어진 월드컵에서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의 의지와 꿈을 실현해준 '에이스 카드'였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2002월드컵 이후 에인트호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애제자' 박지성을 잊지 않았다.

히딩크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에 박지성의 에인트호벤 시절이 마냥 잘 풀리고 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적 초반 숨이 막히고 눈이 돌아갈 정도의 빠른 스피드로 강하게 압박하는 네덜란드 축구에 적응하기에는 박지성의 경험이 일천했다. 박지성이 홈팬들의 야유에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자 히딩크는 어웨이 경기에만 박지성을 기용하며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홈에서 항상 박지성에게 야유를 퍼붓던 에인트호벤의 팬들도 박지성이 점차 네덜란드 리그에 적응하며 제 기량을 발휘하자 애정을 표현했다. 특히 AC 밀란과의 2004/2005 챔피언스리그 2차전의 득점은 박지성의 존재감을 재평가하게 된 계기가 됐다.

히딩크 감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렉스 퍼거슨'의 콜을 받은 후 결행한 맨유행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2005년 맨유로 이적한 이후 7년간 퍼거슨 제국의 일원으로 뛰면서 처음부터 칭찬을 받지는 못했다. '왜 저 선수를 영입했느냐'는 의혹의 시선을 받았지만 결국 성실성을 바탕으로 한 활약 덕분에 '네 개의 폐', '산소탱크'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가치를 인정받았다. 챔피언스리그를 비롯한 큰 경기에서 멋진 활약을 보인 덕분에 '빅 매치의 사나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벤치를 지키는 날이 이어지던 2012년, 박지성은 토니 페르난데스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QPR로 이적했지만 실망스런 결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QPR에서 주장을 맡았던 그는 감독이 해리 레드냅으로 바뀌면서 벤치를 지키는 날이 많아졌다. 결과적으로 QPR은 2부리그 강등이 확정되었고 박지성을 비롯한 팀의 에이스의 행보는 의문에 쌓여 있다.

현재 박지성은 북미축구리그(MLS)를 비롯한 각종 이적 루머에 휩싸여 있다. 국내팬 일부에서는 박지성의 성과를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박지성은 고비마다 항상 실패로 보일 수 있는 계기를 통해 자신의 경력을 업그레이드 해왔기에 이번 QPR의 프리미어리그 잔류 실패 후 보일 행보에 '높은' 기대감을 갖게 된다.

기획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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