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D-128] 마라도나 이전을 지배했던 투우사, 켐페스
입력 : 2014.02.04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왕찬욱 기자= 1978년 월드컵에 디에고 마라도나는 없었다. 하지만, '신' 마라도나가 도래하기 전, 아르헨티나의 왕으로 군림했던 ‘엘 마타도르(투우사)’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리오 켐페스(60)다.

아르헨티나는 자국에서 열리는 1978년 월드컵을 앞두고 여러 사정으로 유럽파 선수들을 불러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국내서 뛰는 선수들을 주축으로 선수단을 꾸렸는데, 그 당시 유일하게 해외에서 활약하던 선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켐페스다. 그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발렌시아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며 아르헨티나 최고의 공격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켐페스의 입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확인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메노티 감독은 당시 10대에 불과함에도 엄청난 지지세력을 보유했던 마라도나를 월드컵에 데려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반향이 거셌지만, 메노티 감독은 “우리에겐 켐페스가 있다”는 한마디로 답했다.

기술과 체력, 스피드와 탄탄함.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은 완벽한 스트라이커로 군림했던 켐페스는 토탈사커의 지휘자 요한 크루이프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팎을 활발하게 넘나드는 그의 스타일은 ‘올라운드 공격수’라 불리기 충분했다. 중앙과 측면 때로는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모두 소화하는 그의 스타일은 당대에는 보기 드물었던 플레이였기에 그를 상대하는 수비수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켐페스의 1978년 월드컵은 사실 시작이 좋지 않았다. 1978년 월드컵은 두 차례의 조별리그를 거친 뒤 결승 진출팀과 3-4위전 진출팀을 가렸다. 1라운드 (첫 조별리그) 1조에서 2승 1패를 거둔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에게 1위를 내주며 2위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는데, 이때 치른 세 차례의 경기에서 켐페스는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최고의 공격수로 꼽히던 그였기에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의심은 곧 끝났다. 절치부심한 켐페스는 2라운드에서 치른 3경기 동안 4골을 터트리며 골머신에 시동을 걸었다.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2-0 승)에서 2골, 그리고 마지막 경기였던 페루전(6-0 승)에서 2골이었다.

같은 대륙의 라이벌 브라질을 간신히 제치고 조 1위로 결승에 오른 아르헨티나는 네덜란드와 우승컵을 두고 결전을 벌이게 됐다. 크루이프를 최고의 선수로 존경했던 켐페스에게는 꿈 같은 순간일 뻔 했지만, 크루이프는 1978년 월드컵이 개최되기 전에 이미 은퇴했다. 다만, 지난 1974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가 선사한 ‘악몽의 90분’(2라운드 0-4 패)은 그대로 기억 속에 남아있기에 켐페스는 이를 갈고 경기장에 나선다.

결승전에서의 켐페스는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첫 골을 터트린 켐페스는 1-1로 연장까지 간 승부에서 다시금 골을 터트리며 승부를 갈랐다. 경기 결과는 3-1로 아르헨티나의 승리.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을 들어올리게 된다. 켐페스가 연장전에 넣은 골은 한마디로 우승컵을 안기는 골이었다. 당연히, 켐페스는 파올로 로시(이탈리아), 디르세우(브라질),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독일) 등 쟁쟁한 스타들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신' 마라도나에 이어 아르헨티나 최고의 축구선수로 꼽히는 켐페스. 그의 뒤를 잇는 자는 누가 될까?

가장 유력한 후보, 아니 혹은 이미 넘어섰을 지도 모르는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가 있다. 메시가 앞으로 어떻게 축구인생을 풀어나갈지는 모르는 일이나, 지금의 기세로는 넘어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아직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켐페스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2014년 월드컵은 자국은 아니지만, 바로 옆 나라인 브라질에서 열린다. 환경 등에서 그만큼 이점이 많다. 과연 메시가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끌며 켐페스를 넘어설 수 있을까?

사진=마리오 켐페스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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