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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인터뷰①] ‘롯데 전설’ 염종석 “혹사 논란? 내 이름 떨치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어”

기사입력 : 2020.08.03      기사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페이스북 공유




[스포탈코리아=부산] 김현서 기자= ‘롯데+1992년= 염종석’ 이것보다 완벽한 야구 공식이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롯데 마운드에 혜성처럼 등장한 염종석.
금테 안경을 쓴 우완 투수의 모습은 ‘무쇠 팔’ 최동원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외모에서 이미 합격. 결과도 좋았다. 아니 완벽했다. 신인 투수가 데뷔 첫 해 17승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롯데를 프로야구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야말로 염종석의 해였다. 신인왕과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 그리고 평균자책점 1위(2.33)를 싹쓸이하면서 롯데 레전드 자리를 빠르게 예약했다.

그러나 행복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잦은 연투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듬해 10승을 거둔 뒤로는 한 번도 두 자릿수 승수를 쌓지 못했다. 결국 1992년 롯데의 우승은 염종석의 오른팔과 맞바꾼 것과 다름 없었다.

이후 평범한 투수로 평범한 활약을 이어간 그는 은퇴 후 프로 코치 생활을 거쳐 현재 MBC 경남 라디오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정상의 자리에 머물렀던 시간은 짧았지만 야구와의 인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어느덧 야구인생 28년 차, 이번엔 아마야구 감독으로 변신했다. 동의과학대 야구부 초대 감독을 맡게 된 레전드 염종석(47)을 만나 1992년의 추억을 소환해봤다.

Q: 지역 방송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장에서 해설위원 눈으로 봤을 때 눈길을 끄는 선수가 있다면.

A: 현재 NC 중계를 맡아서 하다 보니까 NC 선수들 위주로 보게 된다. 먼저 타자 중에서는 올해 유난히 빛나는 강진성 선수가 눈길을 끈다. 작년까지는 풀타임 스타팅 라인업으로 뛰는 선수가 아니었다. 올 시즌 모창민 선수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기회를 잡았다. 본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기회라는 건 우연히 찾아오는데 그 기회를 너무 잘 잡았다. 앞으로 타격 사이클이 있다 해도 올 시즌 3할대 타율을 유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투수 중에서는 송명기 선수를 뽑고 싶다. 피지컬이 좋고 공의 스피드와 움직임이 상당히 좋은 투수다. 아직 강진성 선수만큼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눈여겨봐야 할 선수라고 생각한다.

Q : 또 다른 야구인생이 시작된다. 동의과학대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된 계기는.(*동의과학대 야구부는 2021년 정식 창단 예정)

A: 부산•경남 지역에서 아마 야구 지도자 생활을 하는 동기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교 선수 중에서 대학에 못 가고 프로에 못 가서 야구를 그만두는 아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매년 천 명 정도의 졸업생 중에서 프로에 지명되는 선수는 85~90명 정도다. 그리고 야구부가 있는 4년제 대학교의 수는 20곳 정도고 학교당 매년 뽑을 수 있는 신입생 인원은 7~8명밖에 안 된다. 나머지 선수들은 갈 곳이 없어서 대부분 야구를 포기하게 된다. 성인 야구를 접할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인데 여기에 기회를 더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해 고교 동기들과 제안서를 만들었고 마침 동의과학대 김영도 총장님을 소개받게 되었다. 당시 총장님께 30장 정도의 제안서를 드리면서 20분 동안 브리핑을 했는데 학교 측과 의논한 뒤 결과를 알려주시겠다고 하시더라. 그러고 2주 뒤에 연락이 오셔서 ‘야구단 한번 만들어봅시다’라고 승낙해주셨다. 총장님도 야구를 워낙 좋아하시는 분이라서 나를 믿고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신다. 직접 야구장도 섭외해주시고. 앞으로 (내년에 정식으로) 창단 후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안에 우승하기로 총장님과 얘기를 나눴다.

Q : 다음 질문은 선수 시절 이야기다. 17년간 프로 선수 생활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경기나 순간은.

A: 1992년 프로 첫 선발 경기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원래는 선발이 아니었다. 당시 등판 예정이었던 박동희 선배가 고열로 입원하는 바람에 마운드에 오르게 됐다. 당시 코치님이 갑자기 불러서 “야, 염종석! 너 오늘 선발”이라고 말씀하시더라. 그 말을 듣고 난 후 연습을 하는데 막 구토가 나오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긴장되니까. 그러고 나서 마운드에 올라 던졌는데 조기 강판당했다. (웃음) 옷을 갈아입으러 (라커룸에) 들어가서 ‘내가 왜 그랬을까,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자책하면서 고민하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등짝을 때리더라. 누군지 보니 강병철 감독님이셨다. “어린 놈이 뭐 그런 거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어! 괜찮아, 빨리 옷 입고 나가서 경기 봐”라고 말씀하시더라. 죄인 비슷하게 경기를 보면서 앞으로 선발 기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6일째 선발 기회를 다시 얻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경기에서 완투승을 기록했다.



Q : 92년 당시 ‘염태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굉장했다. 당시 어느 정도였나.

A: 부산은 서울처럼 연예인 볼 수 있는 기회가 잘 없어서 그런지 야구 이야기가 제일 많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인기가 많다 보니) 교통비를 내지 않고 다녔다.(웃음) 음식점에서도 1+1 비슷하게 3인분 시키면 3인분을 더 주셨다. 또 남포동에 나가면 여학생들이 많이 쫓아왔다. 요즘도 쫓아 오는 팬들 있나? 없다. 지하철 한 번씩 타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더라.(씁쓸함)

Q : 당시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투수가 있나.

A: 개인적으로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위에서는 정민철 선수(현 한화 단장)를 라이벌로 꼽았다. 당시에는 (동기지만) 나보다 한 살이 많아서 형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말을 놓고 지낸다. 신인왕 탔을 때 축하 인사는? 다른 팀이었는데 뭐.(웃음) 받은 기억이 없다.(웃음)



Q : 반면 혹사 논란이 있었다. ‘롯데의 우승과 염종석의 팔을 맞바꿨다’는 말도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A: 일반 팬들이 보기엔 당연히 혹사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혹사가 맞다, 안 맞다 이런 이야기는 못 하겠다. 그 당시에는 내가 던지고 싶어서 던졌고 그런 큰 경기에 나갈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나가고 싶어서 나간 거다. 한 번도 후회한 적 없고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다. (다시 돌아가도) 그런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마운드에 설 것이다. ‘세상에 내 이름 떨치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어, 다 좋아하겠지’

Q : 92년 이후 롯데는 우승이 없다. 정상을 올라가 본 선배로서 앞으로 우승을 하려면.

A: 이런 이야기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롯데를 나온 지 벌써 4~5년 정도 됐다. 밖에서 바라봤을 때 롯데의 문제점은 예를 들어 1번 타자다운 1번 타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 3, 4번 타자만 있는 것 같다. 팀 전력에 부족한 선수가 있다면 시즌 끝난 뒤 그 포지션에 맞는 선수들을 데리고 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롯데는 그해 FA 나온 선수 가운데 포지션이 중복되더라도 무조건 좋은 선수들만 데리고 오는 것 같다.
야구라는 게 1번부터 9번 타자까지 타순마다 특색이 있는 건데 무조건 잘하고 몸값이 높은 선수들만 데리고 오다 보니 전부 4번 타자고, 3번 타자다. 포수도 그렇고. 앞으로 짜임새 있는 야구를 하려면 팀에 꼭 필요한 포지션의 선수는 베팅을 해서라도 데리고 오고 없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촬영= 김형준 PD
편집= 김정헌 PD


▶인터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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