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인터뷰] 정형식, 임의탈퇴 이후 첫 심경 고백 ''팬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
입력 : 2020.09.23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신림동] 김현서 기자= “팬들에게 사과드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이 자리를 빌려 진심을 꼭 전하고 싶어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죄송했습니다”

6년 전, 갑작스럽게 그라운드를 떠난 전 삼성 외야수 정형식(29)이 팬들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전했다. 2009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그는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선수로 평가받았다. 처음에는 대수비, 대주자로만 1군 경기에 나서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탄탄해진 수비력을 뽐내며 선발 출전 기회를 잡았다. 2014시즌에는 전 삼성 톱타자 겸 중견수 배영섭이 군입대로 자리를 비우자 주전으로 낙점되면서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첫 주전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정형식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2014년 9월, 삼성이 4년 연속 정규시리즈 우승을 확정 짓기 한 달여 전, 구단으로부터 임의탈퇴 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시즌 도중 음주운전 사고를 낸 뒤 구단에 알리지 않은 대가였다. 순간의 실수였지만 명백한 과실이었다. 유니폼을 벗어야 했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프로야구 무대에 설 수 없게 됐지만 그는 힘든 시기를 넘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가 선택한 것은 요식업이다. 임의탈퇴 처분 이후 오랜만에 언론과의 인터뷰에 나선 '구공족발' 정형식 대표를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Q: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A: 팀을 나오고 나서 바로 군입대를 했다. 제대 후에는 야구를 다시 하기 위해 2~3년 정도 준비하면서 독립 야구 입단 테스트를 받기도 했고 여러 방면으로 야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봤는데 쉽지 않았다. 복귀가 어려울 것 같아서 요식업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Q: 다양한 요식업 중, 족발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A: 큰 이유는 없다. 어느 날, 광주에 있는 지인 족발집에 들렸다가 족발 맛에 빠졌다. 족발을 찾아서 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그집 족발이 너무 맛있었다. 그래서 지인에게 복귀가 어렵게 되면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던 것이 지금 족발집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Q: ‘구공족발’의 뜻이 궁금하다.

A: 나이를 뜻한다. 나는 1991년생이지만 빠른년생이어서 1990년생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큰 의미 없이) 90년생이니까 구공족발이라고 지었다.

Q: 광주(고향)와 대구(삼성)가 아닌 서울에서 차린 이유는.

A: 가게를 준비할 때는 광주에서도 알아봤고 대구도 친숙한 곳이니까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했는데 그래도 서울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지인도 서울 신림동을 추천했다. 동네를 알아봤는데 연령대도 다양하고 (요식업을 하기에) 괜찮겠다고 생각해서 신림에서 시작하게 됐다.



Q: 가게에 선수들 사인이 많다. 매출에 가장 도움이 된 선수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A: 친형(정영일)이 제일 자주 오고 다음으로는 김광현 형이 한국에 있을 때 많이 왔었다. 아무래도 (친형이 소속된) SK 선수들이 자주 온다.

Q. 삼성 선수들은?

A: 김상수 선수가 시간 날 때마다 얼굴 보러 자주 왔었다. 올해는 개인 사정이 있어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연락은 꾸준히 하고 있다.

Q: 지금부터는 족발집 사장님이 아닌 야구 선수 정형식에 대해 질문해보겠다. 우선 삼성의 왕조시절 멤버다.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A: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냥 야구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즐거웠다. 당시에는 크게 못 느꼈는데 지금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그때 팀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삼성의 왕조 시절 멤버와 팀원으로서 함께 뛰었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좋은 시절에 야구를 했었구나 싶다..

Q. 요즘 삼성 야구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A: 제3자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경기를) 이끌어가는 무게감이 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왕조 시절에는 중장거리 유형의 타자들도 많았고… 확실히 지금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요즘 삼성 야구는 뛰는 야구나 작전 야구 위주로 하는 것 같은데 그 시절에는 누상에 주자가 나가 있으면 9번 타자의 순서라도 번트를 대고 다음 타자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스템이었다. 개개인 능력이 좋았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래도 그때 선수들과는 무게감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Q: 프로 데뷔 후 기억에 남는 순간은.

A: 첫 안타를 쳤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상대 투수는 서재응 선배였다. 1군에서 안타 하나를 치기 위해 2군에서 故 장효조 감독님과 노력을 많이 했다. 야구를 하면서 연습을 그렇게 많이 한 적이 처음이었다. (입단 2년 차까지는) 확장 엔트리 때 잠시 1군에 올라가서 수비 한번 나갔다가 들어오는 게 다였다. 타석에 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2009년인가 2010년쯤 당시 코치님이셨던 류중일 감독님이 처음으로 2군에 내려오셨는데 그때 수비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셔서 감독님이 되신 후에 외야수 백업으로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수비를 나가다 보니 타석에 설 기회가 생겼고 첫 안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Q: 반면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A: 다 아시다시피 내 잘못으로 인해 야구를 못 하게 된 순간이지 않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되는 부분이 많다. 당시 (성적 부진으로 인한) 안 좋았던 시기를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했는데 오히려 더 젖어 들다 보니 점점 안 좋은 일이 생겼고 사고까지 일으키게 된 것 같다. 2014년, 그해가 가장 아쉽다.

Q. 임의탈퇴 해제는 된 건가.

A: 아니다. 구단에서 해제를 안 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Q. 비슷한 이유로 임의탈퇴 처분을 받았지만 구단의 철회로 복귀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아쉬운 점은 없나.

A: 아쉽다는 생각보다는 그 선수들이 팬들에게 용서를 받고 야구를 했으면 좋겠다. ‘내가 야구를 못하게 됐으니 당신들도 못해라’ 이런 마음은 전혀 없다. 나도 힘든 시기를 겪어봤으니까. 야구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그만두면 진짜 할 게 없다. 그래서 방황도 많이 하게 되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팬들이 용서해주신다면 야구를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Q: 2018년 일본 독립리그 입단테스트에서 조건부 합격을 받은 것으로 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인가.

A: 조건부 합격을 했지만 계약조건이 구체적으로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에이전트에서 계약 조건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일단 가보라고만 했다. 일본에서 2주 정도 합숙 생활을 했는데 숙소 자체가 너무 열악했다. 난방도 안 되고 너무 추웠다. 식비랑 교통비도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경제적인 부담도 컸고 환경 자체도 너무 맞지 않았다. 한국에서 몸을 만드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본 독립리그에) 입단하지 않았다.

Q: 타 구단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은 적은 없는지. (정영일 선수가 SK 입단 테스트를 알아봤다는 기사가 있었다)

A: 공익 생활이 끝날 무렵, 광주에서 삼성 경기가 있을 때 삼성 숙소를 찾아갔다. 당시 김한수 감독님을 뵙고 공익이 곧 끝난다고 말씀 드렸더니 감독님께서 제대 후 운동을 할 수 있게 매니저한테 말을 해 보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구단에 다시 전화해보니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결국 해를 넘기고 1월 중순쯤 연락이 와서 만났는데 1년 정도를 더 기다리라고 하셨다. 선수들과 연봉협상을 다 끝내고 난 시점이었다.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차라리 임의탈퇴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구단에서는 너를 원하는 구단이 있으면 풀어주겠다고 했는데 다른 구단에서는 당연히 임의탈퇴로 묶여있는 선수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는다. 형이 SK를 비롯해 여러 구단을 알아봐줬지만 임의탈퇴 신분이라서 구단들이 (테스트를) 거부했다.



Q. 테스트는 불발됐지만 동생을 위하는 형의 마음이 느껴진다. 정영일 선수는 어떤 존재인가.

A: 형은 나의 ‘롤모델’이었다. 투수로서도 잘했고, 타자로서도 잘했다. 그리고 ‘할 때 하고 놀 때 노는’마인드도 멋있었다. 시합 나가면 성적도 좋았고, 마운드 위에서 ‘칠 테면 쳐 봐라’ 할 정도로 자신감도 좋았다. 그렇다고 자만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Q: '롤모델'이라고 말한 것을 형이 보면 감동받겠다.

A: 학.창.시.절 까지만.(웃음) 고2 때까지만 ‘롤모델’이었다. (웃음) 프로에 와서 보면 형보다 월등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프로에 와서 처음에는 내가 왼손 타자이기 때문에 이치로 선수가 동경의 대상이었고, (삼성에서) 이승엽 선배와 함께 야구를 하고부터는 이승엽 선배로 바뀌었다. 몸관리 하시는 것을 보면서 배우기도 했고.

Q: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마디.

A: (임의탈퇴 처분 이후) 공식적인 인터뷰는 처음이다. 팬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기회가 없었다. 이 자리를 빌려 팬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때 당시, 팀에 큰 폐를 끼친 것 같아서 팬들에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도 하고 싶다. 그날 이후 대인기피증이 생기게 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팬들이 보낸 메시지를 보면서 힘을 낼 수 있었다. 물론 가족이나 지인들의 위로도 있었지만, 개인 SNS를 통해 보내주신 팬들의 응원 글들을 보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

팬들 덕분에 대인기피증이 없어졌고, 팬들 덕분에 복귀를 준비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영상 촬영: 김형준PD, 오윤식PD
영상 편집: 김형준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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