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만렙] 아시안게임 MVP, 그 상의 이름이 ‘상백배(想白盃)’였던 것을 아십니까
입력 : 2019.11.20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이은경 기자= 한국이 처음으로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것은 1954년 마닐라 대회 때다.
아시안게임은 1951년 뉴델리 대회가 초대 대회인데, 한국은 사실상 1970년대까지도 훈련비나 체재비가 충분하지 않아서 아시안게임에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때부터 대한체육회의 후원으로 대회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상이 생겼고, 그 이름이 바로 ‘상백배(想白盃)’였다. 어떤 사연으로 생긴 상이었을까.

한국이 열악한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굵직한 스포츠 스타들을 배출한 역사는 그 자체로 기적이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놀라운 스포츠 역사는 또 있다. 국제대회 선수 파견조차 어려웠던 그 시기에 이미 한국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배출해 국제 스포츠 외교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고(故) 이상백(1904~1966) 박사다.

이상백은 1923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농구에 빠져들었다. 식민지 조선 출신의 청년에게 스포츠는 차별을 느끼지 못하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센터로 활약한 이상백은 일본 최초의 대학농구팀을 만들고, 와세다대를 전국대회 전승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미국 연수까지 앞장서서 추진해 성사시키는 추진력을 보여줬다.

이상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일본농구협회 신설도 추진했고, 최고의 농구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일본 농구계는 이상백 박사를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이상백은 이후 일본 체육회 전무이사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전무이사 자격으로 1932년 LA 올림픽에 참가해 국제 스포츠 인맥을 쌓아갔고, 이를 바탕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농구가 정식 종목으로 들어가도록 미국 등의 관련 인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해 성사시킨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이 되자 이상백은 자신의 역량을 조국 스포츠 발전에 쏟기 시작한다. 그는 조선체육회를 부활시켰고, 조선올림픽위원회를 만들어 IOC 가입 절차에 들어갔다.

한국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최초로 참가하는데, 참가 신청을 하던 시기에 한국은 정부를 설립하기도 전이라 IOC에 정식 가입 신청을 할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올림픽 참가 승인을 받는다. 사상 유례 없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 성과는 이상백의 외교력과 인맥 덕분이었다.

1952년에 진행된 아시아경기연맹(현재 OCA의 전신) 가입도 이상백 박사가 없었으면 빨리 진행되기 불가능했다.

대한체육회는 1966년 이상백 박사가 타계한 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부터 대회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상백배’를 제정했다. 단순히 성적이 좋은 선수가 아니라 아시아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모범적인 선수에게 500만원 상당의 순은 트로피를 수여했다.

‘상백배’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삼성 MVP 어워즈로 그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이상백 박사의 뛰어난 스포츠 외교력, 과감한 추진력과 도전 정신은 지금도 잊어서는 안 될 자랑스러운 한국 스포츠의 역사로 남아 있다.

사진=KBS '인물현대사' 방송 캡처

*‘국대만렙’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자랑스러운 성공 스토리를 담은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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