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 플러스] '초대 챔피언' 박경호 선생이 전하는 아시안컵 첫 우승의 순간
입력 : 2015.01.29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아시안컵 초대 우승을 이끈 축구원로 박경호(85) 선생이 55년 만의 우승 도전을 힘을 싣는다.

대한축구협회는 박경호 선생이 오는 31일 호주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한국과 호주의 결승전을 직접 참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경호 선생은 1930년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1946년 월남하여 경신중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6년~1958년 대표선수로 활약했으며 제1회아시안컵 우승 멤버다. 1969년 모교인 경희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 한양공고 건국대 육사 서울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KBS 축구해설위원, 스포츠서울 칼럼니스트로 활약했으며 일본 오이타 클럽 기술고문으로 10년 넘게 활동했다. 저서로는 실전 축구, 실전 축구학, 한국 축구 100년 비사, 일본은 적, 저팬은 친구 등이 있으며 축구인 최초로 대한체육회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85세의 고령에도 <스포탈코리아>에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박경호 선생은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도 재조명하고 있는 전설이다. 지난해 AFC의 초대를 받아 아시안컵 조추첨식 행사에 참석했다. 당시 AFC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추첨식에서 박경호 선생을 제1회 아시안컵에 출전한 축구 원로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라고 소개한 바 있다.

55년 만에 아시아 정상을 노리는 슈틸리케호에게 박경호 선생은 더할 나위 없는 12번째 선수다. 아시안컵에서 반세기 넘도록 우승을 못하는 처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박경호 선생. 그가 전하는 아시안컵 초대 우승의 짜릿한 순간과 정상 탈환에 나선 후배들에게 전하는 응원의 메시지를 들어보자.

1956년 홍콩 제1회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의 일이다. 당시 9월에는 제1회 아시안컵대회가 아시아축구연맹(AFC) 주최로 홍콩에서 개최 되고, 11월22일부터 12월8일까지는 16회 하계 올림픽대회가 호주 멜버른에서 열림에 따라 한국은 일본과 올림픽예선전을 치르게 되었다.

일본과의 예선전은 홈앤드어웨이 방식 경기를 갖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선수의 입국을 허락 할 수 없다고 하여 모두 도쿄에서 치렀다. 1차전은 어이없이 0-2로 패하고 말았다. 6월10일 열린 2차전에서는 한국이 2-0으로 승리 연장전에 들어갔다. 연장전도 득점 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당시에는 승부차기제도가 없었으므로 추첨으로 일본이 출전권을 따고 말았다.

우리는 멜버른 올림픽 출전에는 실패하였지만, AFC주최 제1회 아시안컵예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동부 지역 중 일본은 올림픽출전으로 기권하고, 한국은 자유중국에 승리함으로써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제1회 아시안컵 축구대회는 1956년 9월6일부터 15일까지 홍콩스타디움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으나, 한국대표팀은 자유중국과의 동부지역 예선 2차전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9월 2일 서울을 출발했다.

당시 한국축구협회 재정은 무척 어려웠다. 명색이 국가대표축구팀인데도 비행기요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KNA(KAL의 전신)과 교섭해서 타이베이까지만 외상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자유중국에 패하면 그대로 귀국하고 이겨서 홍콩에 가게 되면 자유중국과 한차례 친선경기를 가져, 그 수입으로 홍콩까지의 비행기요금을 충당키로 한 것이다.

동부지역 예선2차전에서 한국이 자유중국을 2-1로 이겼다. 자유중국은 우리의 제안을 받아 들여, 친선경기를 9월 4일에 갖기로 했다. 그러나 3일부터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부득이 경기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홍콩행 각국비행기는 있었으나 외상비행기를 타야하는 한국 팀은 KNA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경기 당일 한국 팀은 두 시간이 지연된 새벽 7시에 KNA편으로 홍콩에 도착했다.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 개막전인 한국과 홍콩의 경기는 이날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운 선수들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곧장 운동장으로 나갔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 되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전반에 2-0으로 리드 당했다. 그런데 후반이 시작되자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며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든 한국 팀은 천운의 2골을 연결시켜 2-2 무승부로 끝냈다.

2차전에는 발군의 스타플레이들이 많은 이스라엘을 2-1로 제압하고, 3차전에서는 월남을 5-3으로 물리치고, 당당히 제1회 아시안컵 축구선수권대회 우승컵을 안았다. 그때의 감격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58년이 지난 2014년 3월 26일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아시안컵 본선 조추첨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 나는 뜻밖에도 제 1회 아시안컵대회에서 우승한 참가선수 중 생존자로 초청되었고, 아시아축구연맹 회의에 참석한 많은 각국의 관계자들에게 소개되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나는 26세의 당시의 선수로 돌아가 우승 후 선수들이 서로 껴안고 울며 만세를 외치는 그런 기분을 다시 느꼈다. 더욱이 AFC회의에 참석한 정몽규 한국축구협회장, 안기헌 전무, 황보관 기술위원장, 홍명보 감독 등의 세심하고 진실한 호의와 그들의 한국축구발전의 열의는 늙은 축구 인을 감격시켰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월드컵 최다 출전국이며 아시아의 축구강국이다. 그러나 현재 아시아 왕좌를 우리는 지키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노 축구인의 욕심은 한국이 하루빨리 아시아 왕좌를 되찾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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