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택의 제대로축구]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와 싸웠다③
입력 : 2016.06.30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홍의택 기자= 그러니까 딱 30년 전 이야기다.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의 월드컵 출전.

국가대표 선수가 볼에 직접 바람을 넣었다. 몸소 간식을 챙겼다. 지원 스태프는 언감생심. 어쩌면 천연 잔디라곤 얼마 있지도 않던 아시아의 일개 국가, 그 대표팀이 멕시코 현지에 입성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워 싸웠다①(다시보기 클릭)
■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워 싸웠다②(다시보기 클릭)


현지 시각으로 1986년 6월 2일 오후 1시. 멕시코시티의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조별 리그 첫 경기. 전반 5분도 채 안 돼 허정무가 마라도나란 괴물을 들이받았다. 상대가 중앙을 가르며 들어오자, 측면에 머물던 허정무가 잽싸게 달려들었다. 어라. 이건 생각도 못했던 템포다. 한 발 빨리 빠져나간 마라도나를 뒤늦게 제지하자, 주심이 파울을 선언했다.

"타임지 표지에 실리면서 유명해졌죠. 잘 보면 볼이 무릎 부분에 있었어요. 그걸 걷어낸 것으로 고의적인 파울은 아니었어요. 주심도 경고를 안 줬고요. 개인적으로 참 운이 좋아 요한 크루이프, 베켄바우어와 운동장에서 다 맞붙어봤어요. 그런데 마라도나는 솔직히 어떤 한 선수가 마크하는 게 불가능한 선수였어요. 상대방 중심을 역이용할 줄 알았고, 터치나 그런 게 정말 남달랐죠."(허정무 현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





전반 20분도 채 안 돼 두 골이나 얻어맞았다. 김정남 감독이 구상했던 '투망 수비(큰 그물을 던져 원형으로 퍼지게 하고, 그 안에 들어온 물고기를 잡는 방식을 축구에 적용)'도 무용지물이었다. 김평석을 마라도나에게 맨투맨으로 붙였으나, 소득은 없었다. 벤치에서 발 동동 구르며 급히 외쳤다. "(조)광래 준비해 얼른!".

죄다 단발머리에 딱 달라붙는 빨간 유니폼. 이 동양인들이 누가 누군지 분간도 안 됐으리라. 서독서 뛰던 차범근 정도가 경계 대상이었는데, 이마저도 시원찮았으니. 조별예선 첫 경기부터 다득점으로 흥 좀 내보자 싶었다. 대표팀을 중앙선 아래로 밀어뒀다. 가드를 채 올리기도 전에 무차별 공격을 강행했다.

전반 22분, 대표팀은 운영 방식에 변화를 준다. 지독한 대인 방어 대신, 지역 방어의 개념을 살짝 얹은 것. 마라도나와 자리가 겹쳤던 김용세가 서서히 이 선수에게 접근했다. 물론 마킹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 시절 보기 드문 장신 공격수였던 김용세는 마라도나와의 무게중심 싸움에서부터 밀렸다. 재빨리 돌아서던 상대의 반응 속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다행히 내성도 생겼다. 전반 중후반에 접어들며 간간이 반격도 했다. 차범근이 상대 수비와의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 주춤주춤 타이밍을 재며 돌파도 시도했다. 최순호 역시 볼을 잡았다. 상대 수비를 등지고 키핑한 뒤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180cm 후반대 장신에 배어있었던 부드러움은 실루엣만으로도 탁 튀었다. 조광래 투입 후에는 전진 패스 빈도 또한 한결 늘었다. 정신 못 차릴 만큼 당하고도 다시 튀어 올랐다.

"직접 가서 부딪혀보니까 마라도나 말고도 좋은 선수들이 정말 많더군요. 국제적인 경험이나 정보 없이 경기에 나가야 했으니 나 자신부터도 긴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라커룸 복도에서 같이 걸어 나오던 아르헨티나 감독도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어요. 서로 상대를 모르다 보니 그랬던 거지(웃음)."(김정남 현 한국 OB축구회 회장, 당시 축구대표팀 감독)

"두 골 먹고서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이러다가 정신없이 실점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고. 진짜 다들 가격이 엄청난 선수들 아니야(웃음). 플라티니가 잘한다 잘한다 했어도, 마라도나는 펠레 이후 처음으로 나온 차원 다른 선수였어요. 갖고 있는 기술부터 천부적이었죠. 나도 당시 유럽에 같이 있었으니 마라도나를 자주 접했거든. 프랑크푸르트에 있었을 때, 사실 나폴리에서도 나를 원했었는데. 그때 레버쿠젠으로 선회했더니 그다음에 마라도나가 나폴리로 떡 하니 가 있더라고. 예견대로 특별한 선수였어요. 연습장에서부터 난리가 났죠. 훈련에만 6만 관중이 들어찼다는 얘기가 이탈리아 언론을 통해서 퍼졌어요."(차범근 현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하프타임 15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른다. 아니, 마라도나가 이쪽으로 오면 여기서 같이 둘러싸야 돼. 그러면 또 주위에서 덮쳐주고. 할 수 있다니까. 자, 자, 다시 해보자. 언성을 높였다. 박수 소리에 함성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0-2로 끌려갔어도, 후반 45분이 남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견디자. 하나둘 재정비하면서 사기를 끌어올렸다. 멕시코시티 스타디움의 공기에도 적응이 됐다, 슬슬.

"아시아에서는 상대 전력 때문에 힘들어해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우리 팀에 워낙 훌륭하신 선배들이 많이 계셨으니까.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역시 세밀하더라고요. 경기에 대한 운영 능력이 정말 매끄럽더군요. 마라도나는 볼이 몸에 붙어 다녔고요. 전반 마치고는 실점에 대한 부분들을 복기했어요. 수비 조직이 어떻게 커버 플레이를 들어가야 할지 등등. 사실 공격에 대해서는 저, 그리고 범근이 형, 순호 형께 '소신껏 하라'고 믿고 밀어주셨죠."(김주성 현 대한축구협회 심판운영실장)

"지금 룰이었으면 서너 명은 퇴장당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렇게라도 버텨야 했던 거지. 난 당시 수비에 서서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정면에서 생생히 봤어요. 이야, 저 정도 갖다 받으면 부러졌겠다 싶었지. 그런데 태클을 피할 때 몸 중심을 살짝 띄우더라고. 그걸 어려서부터 접해왔던 선수다 보니 상대가 들어올 타이밍을 다 알고 충격을 완화하더만. 그리고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무슨 종아리가 우리 허벅지만 한 거야. 나도 한 허벅지 했는데. 가만 보니 정강이 보호대를 앞뒤로 했더라고. 얼마나 견제가 심했으면 저렇게까지 했나 싶었죠."(조민국 현 청주대 감독)

웬걸. 단단히 마음 고쳐먹고 들어갔더니 후반 시작부터 한 골 더 먹었다. 오히려 이때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더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나오자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김정남 감독은 김평석, 김용세, 허정무가 맡았던 마라도나에게 또 다른 인물을 보냈다. 포항제철아톰즈의 박경훈.

"허정무 선배가 그때 몸이 아주 좋았어요. 근성도 있었고. 하물며 별명도 진돗개 아니야(웃음).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부딪혔으면 일어나지도 못했을 거예요. 마라도나는 진짜. '악' 소리 지르면서 쓰러지는데, 무슨 곰 한 마리가 누워있는 것 같더라고. 저런 몸을 갖고도 어떻게 그렇게 민첩할까 싶었죠. 후반 20분경부터 이 선수를 마크했는데, 어찌나 힘들던지. 그 옆에 딱 붙어서는 일부러 호흡 참고 그랬다니까요. 그것도 고지대에서 말야. 정말 죽는 줄 알았지(웃음). 볼이 반대편으로 가면 그제야 참았던 숨 몰아쉬고요. 왜 그랬냐고요? 힘든 거 들키면 걔가 더 기 살아서 날뛸까봐."(박경훈 현 전주대 축구학과 교수)





그 무렵, 벼락같은 골이 번쩍했다. 1954 스위스 월드컵 당시 우리의 성적은 2전 전패, 0득점, 16실점. 헝가리에 0-9로 완패했고, 터키에 0-7로 무너졌다. 마지막 서독전은 상대의 다음 라운드 진출 및 대표팀의 조별예선 탈락 탓에 열리지도 않았다. 골 맛 한 번 보지 못한 채 수십 시간에 달하는 비행을 감내했다. 월드컵 본선 골이란 그렇게나 어려운 것이었다.

주인공은 차범근도, 최순호도 아니었다. 후반 28분, 볼 잡은 최순호가 횡으로 옮겨갔다. 상대 수비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누군가 이를 가로챘다. 가운데에 있던 등 번호 10번 주장 박창선(상단 사진 오른쪽). 이어 오른발로 볼을 세차게 때렸다. 기습적으로 날린 슈팅은 상대 골키퍼가 손 쓰기도 전에 골망에 꽂혔다. '알고도 못 막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나 쓰는 것. 당시 해설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너무도 담담하게, 또 조곤조곤하게 "네, 우리도 골을 넣었죠".

"전반전에 허무하게 골 먹고 그랬으니까요. 자존심 완전히 구긴 상황에서 최선 다해보자면서 다시 뭉쳤죠. 후반부터 저돌적으로 나가니 걔네도 당황했어요. 개인적으로 그동안 프로, 실업, 대학 등에서 득점상도 꽤 받아봤는데, 아르헨티나전 골은 비교가 안 될 만큼 색달랐어요. 포물선이 위로 향하다 뚝 떨어지는 골이었죠. 실은 고지대에 적응을 못 해 시합 직전까지 사흘 동안 밥도 못 먹었어요. 그런데 앞이 순간적으로 열렸고, 상대도 멀리 있어 빠르게 마무리했죠. 그 짜릿함을 아직 잊질 못해요."(박창선 현 김해 박창선 축구클럽 감독, 전 경희대 감독, 당시 대표팀 주장)

"월드컵 2년 전쯤에 다친 발목이 다시 도졌어요. 브레멘 원정 게임 갔을 때, 상대한테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를 찍혔거든. 오쿠데라 알죠? 그 아시아 최초 분데스리거 있잖아. 당시에는 경험이 없어서 그냥 얼음 대면 되겠구나 했는데, 나중에는 심각해지더라고. 월드컵은 다가오지, 수술 시기는 놓쳤지, 복숭아뼈 뒤로 힘줄은 자꾸 삐져나오지. 그러면 너무 아파서 가슴에 뜨거운 게 훅 올라왔다 내려가요. 그 이후에 수술했더니 (앉았다 일어나며) 지금도 이 부위가 이렇게 펴지질 않아. 결국 사람들이 기대했던 만큼 큰 도움이 못 됐어요. 그래도 내가 한 발 더 뛰면 동료들에게 그만큼 공간이 생기리라 봤고. 그러다 기막힌 골까지 나왔으니 정말 고마웠죠."(차범근 현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그렇게 깨져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시아 무대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모두 방에 틀어박혔다. 숙소 복도가 적막했다. 참 묘한 것이 홀가분한 감정도 함께 피어올랐다. 우리가 진짜 월드컵이란 대회에 나왔구나. 정말로 마라도나란 선수와 붙어봤구나. 앞으로도 한 번 해볼 수도 있겠구나. 그래, 그래도 한 골은 넣고 끝냈잖아.

분위기는 다음 날 미팅에도 이어졌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정남 감독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질문했다. "민국아, 우리가 왜 세 골이나 먹었겠냐". 스물둘 조민국이 답했다. "왜요? 그래도 마라도나한테 골 안 먹었으면 잘한 거 아니에요?"(발다노 2골, 루게리 1골. 마라도나는 도움만 기록). 모두가 피식했다. 고참 조광래도 걸쭉한 사투리로 한마디 보탰다. "다음 게임부터는 맨투맨 너무 단디 붙이지 말고 증상적으로 함 해보입시더. 우리가 그리해서 능력을 체킹해봐야 후배들도 나중에 월드컵이 으떤 건지 알 거 아이오".

대표팀은 2차전 불가리아를 상대로 우중 혈투를 벌였다. 한 골을 먼저 실점했으나, 후반 들어 김종부가 동점을 만들었다. 월드컵 사상 첫 승점을 품에 안았다. 마지막 이탈리아전도 선전했다. 2-3으로 패했지만, 끝까지 상대를 몰아붙였다. 그것도 1982 스페인 월드컵 우승 팀을 말이다.

전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1954 스위스 월드컵. 그 맥을 다시 이어나간 1986 멕시코 월드컵. 당찬 도전은 1무 2패로 막 내렸다. 대한민국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나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쓴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사상 첫 원정 16강까지 일궈낸다. 그리고 2016년 현재,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최종예선을 앞두고 있다.

왼쪽 가슴에 붙은 태극기 하나 훈장 삼았다. 세계 축구 조류에 맨주먹 하나로 맞섰던 시절. 당대 최고 마라도나라 한들, 조국의 기대를 업고선 악으로 깡으로 싸웠던 때. 그러니까 그게 불과 30년밖에 안 된 이야기다.

■ 총 세 편에 걸친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와 싸웠다' 종료합니다. 그 외 이야기들 엮은 <번외편>은 내달 5일 업로드 예정.

■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워 싸웠다①(다시보기 클릭)
■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워 싸웠다②(다시보기 클릭)

사진=대한축구협회, 스포탈코리아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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