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택의 대담] 아시아의 리베로가 말한다, '한국 중앙 수비수'
입력 : 2017.05.24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천안] 홍의택 기자= 좋은 중앙 수비수는 귀하다. 매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단순 '행운'을 들먹이기도 한다. 무턱대고 '개인의 노력'을 깔고도 본다. 하지만 빼어난 재목을 길러내는 특정 국가, 특정 클럽팀이 어딘가엔 존재한다. 뒤집어 '육성 방식 및 환경'이란 부문을 한 번쯤 꼬집어봐야 한다는 얘기.

이에 가감없이 목소리 낼 인물을 찾아왔다. 선수로 경험하고 지도자로서 지휘하며 식견 쌓은 인사를 물색했다. 2011년부터 수비수 육성을 위한 'KOREA SHIELD PROJECT'(이하 캠프로 지칭)를 벌여온 홍명보 장학재단 이사장이라면 어떨까 싶었다. '골 결정력 부족'과 더불어 한국 축구를 성가시게 한 '대형 수비수 부재'에 관해 말할 자, 아시아의 리베로로 불리던 홍명보라면.

▤ 얼마 전 미국에서 돌아왔다고 들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미국에서 농구나 아이스하키 등 여러 스포츠 현장을 경험했다. 축구도 봤다. 내가 뛸 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그간 대표팀에서 스탭으로만 10년 가까이 보냈는데.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적었으나, 작년 월드컵 이후 많은 것을 채웠다. 이제는 노는 것에 맛을 들였다(웃음)."

▤ 지난 4월 이후 오랜만에 캠프를 개최했다. 그 사이 이 캠프를 거친 이상민, 장재원 등 17세 아이들이 칠레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도 내고 왔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개개인 실력이 많이 늘었던가.

"일단 본인들이 갖고 있는 것 이상으로 찬사를 받았으니 좋은 일 아닌가. 17세 월드컵에서 성적을 낸 것에 대해 우리 재단의 수비 캠프가 공헌했다는 얘기도 도는데, 그런 건 아니다(웃음). 다만 아이들이 더 성장하는 데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지금껏 개최를 이어온 것도 이 때문이다."



▤ 선수 생활을 마친 지 만 10년 정도 됐다. 이후에는 지도자로서 축구 현장을 경험해왔고. 흐름을 엿봤을 때, 수비수로서 느끼는 현대 축구의 가장 큰 변화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일단 빌드업이다. 요즘 축구는 이를 굉장히 내려서 한다. 바이에른 뮌헨은 코너플래그 있는 곳까지 중앙 수비수를 내려서 할 정도다. 그 앞 공간을 이용하기 위함인데, 그러다 보니 수비수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빌드업 능력도 한층 높아졌다. 그런데 아까도 봤듯(홍 이사장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짧은 강연 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본인들에게 자신 있는 것을 꼽으랬더니 킥, 태클 이런 것들을 얘길 하지 않던가. 빌드업, 패싱력 등이 많이 요구되는 현실과는 상반된다."

▤ 맞다. 골킥 짧게 처리하는 팀들 보면 중앙 수비수를 페널티박스 모서리 근처에 놓는 경우가 숱하다. 예전 모 인터뷰에서 빌드업과 더불어 속도도 몰라보게 빨라졌다고 말한 것을 본 적 있다. 그러다 보니 수비수가 요구받는 능력치도 더 다양해지지 않았나. 여러모로 어려워졌다.

"상대 선수, 상대 팀의 스피드는 나날이 빨라지니까. 수비수들은 하나의 생각만 갖고 있으면 안 된다. 항상 두 가지 이상 갖고 있어야 이게 아니면 저 방법으로 반응이 된다. 그래야만 상대 공격수한테 당하는 것을 줄일 수 있다. 결국 본인 스스로 능력을 키우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 빌드업과 속도. 우스갯 질문이지만 본인은 여기에 얼마나 부합했다고 보나. 이실직고하자면 2002 한일 월드컵 포함 선수 홍명보의 경기를 쭉 돌려봤을 때, 발밑 능력은 좋아도 빠른 수비수였다고 평하기는 어렵지 않나(웃음).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일대일 대결에서 탁월했던 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지능적으로 볼을 차는 타입이었다.

"어휴, 난 빠른 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웃음). 몸이 강하지도 않았다. 시스템 자체가 스리백이었고, 그 가운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갖고 있는 능력 중 위치 선정, 빌드업은 좋았던 것 같다. 또, 옆 선수들과의 조화를 잘 이뤄냈고. 2002 월드컵이 잘 됐던 것도 각자의 능력이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태영은 빠르고, 맨투맨 능력이 좋았다. 최진철은 제공권이 좋았다. 난 그 사이에서 수비 라인을 조율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 만약 현역 수비수 중 저 두 가지 능력을 모두 갖춘 이상적인 선수가 있다면 누굴 꼽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준다면 조금 더 쉽게 체감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외로 넓혀보자면 잘하는 선수가 한둘이야 하겠느냐만은 우루과이의 디에고 고딘, 그 친구 잘하더라. 키가 크지 않은데 공중볼 능력도 있고, 득점까지 할 수 있는 선수다. 인상적이었다."



▤ 홍명보라는 인물은 중앙 수비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주인공이다. 그 입장에서 보기에 대한민국 중앙 수비수의 미래는 어떤가. 런던 올림픽 당시 지도했던 1989년생 세대, 리우 올림픽을 준비하는 1993년생 세대는 대중에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그 다음을 책임질 현 15~17세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하고 있나.

"현 올림픽 멤버인 송주훈은 재작년까지 우리 캠프에 다녀갔다. 그 다음이 이번 17세 월드컵을 경험하고 지금 캠프에 와 있는 아이들인데, 더 발전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게 세대마다 편차가 무척이나 심하다. 그러다 한 해에 좋은 선수가 몰아서 나오기도 하고, 몇 년씩 가뭄이 생기기도 한다. 또, 3학년이 경기에 뛰면 2학년이 부족해지고, 그러면 1학년은 더 심각해지는 악순환 역시 벌어진다. (중, 고등학교를 각각 3년씩 묶는 현 편제를 탓하는 건가) 시스템은 교육부에서 알아 할 일 아닌가(웃음)."

▤ 개인적으로는 1997~98년생 기점으로 재목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도 해본다. 일선 지도자 대다수가 했던 얘기들도 이와 비슷하고. 현 세대만의 문제일지, 아니면 시스템의 문제로 확장해 봐야 할지 궁금하다. 앞서 준수한 세대가 등장한 데는 지도자들의 엄청난 노력이 배어 있겠지만, 이후 연속성을 갖지 못하는 아쉬움도 크다.

"그래서 전문적인 수비수 육성이 필요한 것이다. 앞으로는 점점 더 그럴 것이다. 기존의 한국 수비수가 지닌 스타일을 바꿀 필요가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전문 수비수로 성장하지 못하니 나중에는 근본적으로 변하기 어려워진다. 수비수에 대한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도 한몫한다고 본다. 다들 (공격처럼) 좋은 것 하려 하지, (수비처럼) 궂은 일 하려고 하나(웃음)."

▤ 그러다 보니 결국 돌려막기 아닌가. 타 포지션의 선수를 아래로 내리는 식이다. 홍 이사장 본인도 고려대 3학년까지 미드필더에서 뛰다가 수비수로 옮기지 않았나. 또래보다 발육이 빨랐다는 이유만으로 어렸을 때부터 중앙 수비에 끼워맞춘 경우도 적지 않다. 현재 청소년 대표씩이나 한다는 자원 중에도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에 치우친, 단기간에 만들어 빈 자리 메우는 데 급급했던 경우가 보인다.

"신체 조건만으로 축구를 하는 것은 아마추어 단계에서나 가능하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는 그게 당장 먹힐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아니다. 조그맣더라도 수비수 싹이 보이면 잘 가르쳐볼 만하다. 요즘 세상에 170cm 중반대는 많이 작다고 하지만, 175~6cm만 되도 중앙 수비 역할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존재한다. 보통 15세 이전에 기술, 전술 이해 능력 등이 마무리가 되고, 17세부터는 신체적인 조건이 향상된다. 그때는 몸이 확 불고 클 수 있으며, 밸런스 측면에서도 한결 나아질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기다려 성장시키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중학생 레벨만 봐도 신체 조건이 좋지 않지만 재목이 괜찮은 이들이 더러 있다. 대체로 작고, 느린 특성을 지니는데, 당장의 평가로는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17~18세를 넘기지 못하고 싹이 다 잘려 버린다. 20세가 넘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말이다."



▤ 신장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176cm 키에 발롱도르를 거머쥔 칸나바로의 특별한 케이스도 있었다. 이러한 특수 자원을 배출하려면 결국 전문적인 육성이 필요할 텐데. 학원 축구 팀, 프로 산하 팀 지도자도 충분히 뛰어나다는 가정하에 질문한다. 현재보다는 수비 파트에 더 전문성을 갖춘 지도자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이들을 당장 모든 현장에 파견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전문 자원 육성이 필요한 건 중앙 수비뿐 아니라 센터 포워드도 마찬가지 아닌가. 미국에서 우리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러 간다길래 동네 아이스하키 구장에 한 번 따라가봤다. 그곳엔 철저하게 분야별 코치들이 다 있더라. 펜스면 펜스, 스틱이면 스틱. 스틱 중에도 드리블만 따로, 회전만 따로 가르치는 것이다. 동네 아이스하키 팀인데도 말이다. 미국이 아이스하키가 전통적으로 발전해온 국가라고는 하지만, 한국 축구도 그런 전문성을 따라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너무 부족하다. 이 캠프에 전국의 수비수들을 다 불러 교육할 수도 없지 않나. 내가 질문 하나 하자. 이 아이들에게는 1박 2일 교육이 끝인데, 이를 통해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보나."

▤ 글쎄, 좋은 경험이 됐을 것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말했듯, 전설적인 수비수와 함께 운동했다는 것이 동기 부여가 될 터다. 하지만 송두리째 바뀔지는 의문이다. 하루 이틀이라면 모를까, 금세 같아질 것이다. 훈련 프로그램의 내용은 물론, 중간 중간 어떻게 코칭하느냐가 아이들 성장에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텐데. 이는 결국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방향, 철학과 결부될 부문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학교에 돌아가 보면 지도자들이 원하는 게 여기(캠프)와는 다른 거다. 실전에서는 성급하게 킥이나 태클 같은 것들을 요구한다. 그것이 결국 우리 지도자들이 만드는 수비수의 형태가 돼가고 있다. 우리가 유럽의 전형적인 수비수에 버금가는 재능을 키울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도 이 때문일 수 있다. 이런 풍토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스스로 잘 기억했다가 '이런 선수가 꼭 되겠다'며 노력하는 본인 의지밖에 없다. 여기에 각 학교의 지도자들이 도움을 주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다."

▤ 한국을 방문한 모 해외 스카우터가 인상 깊었다며 치켜세운 고등학생 선수가 있었다. 프랑스 리그 앙에서 400경기 이상 출전한 베테랑으로서 '한 수 앞서 예측하고 준비된 자원'이라고 평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한 개인의 선택일뿐, 수비수로서 대성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재밌는 점은 그 선수가 연령별 대표팀과는 거리가 먼 친구더라는 것이다. 보통은 좋은 선수를 보는 눈이 다 거기서 거기이지 않나. 상반된 평가가 흥미로웠다.

"우리가 그동안 과연 좋은 수비수로 평했던 그 형태를 한 번 보자는 거다. 아까 아이들이 꼽았던 킥과 태클 등. 그게 우리나라 수비수의 전형적인 형태로 굳어버렸고, 여기에 맞지 않는 아이들은 버려져 왔다. 이게 현실이다. 킥이 좋아서 나쁠 것은 없지만, 안 좋아도 된다. 태클 역시 마찬가지다. 킥은 상대 공격을 방해해 걷어낼 정도만 되면 되고, 태클은 지능적으로 뛰어나 중간에 다 잘라버릴 능력이 된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본인들 스스로 킥이나 태클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배워왔다. 그게 문제다. "

▤ 전문적인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는데. 가령 협회 차원에서의 거국적인 움직임으로 모든 것을 개정하기에는 돈도, 시간도 만만찮다. 제약이 따르지 않는 범위에서 천천히 바꿔나갈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 있다고 보나.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팀에서 뛸 수비수의 기준은 유럽의 그것과 같아져야 할 것이다. 남미든, 아프리카든 다 그런 형태를 닮아간다. 계속 유럽의 상위 레벨 팀과 경기해 보면서 선수 스스로 느끼고 변해야 한다. 지도자는 조금 더 길게, 멀리 볼 수 있어야 한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리더십 뛰어나며, 수비 감각이 있다면 당장 신체 조건이 안 좋아도 더 지켜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진=홍의택 기자,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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