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택의 제대로축구] 30년 전, 그들은 마라도나와 싸웠다②
입력 : 2016.06.27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홍의택 기자= 그러니까 딱 30년 전 이야기다. 월드컵이라곤 남의 나라 얘기였던 때다.

말이 좋아 '아시아의 호랑이'. 축구 변방 아시아의 일개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월드컵이 얼마나 큰 대회인지 알 리도 없었다.

그랬던 세계 무대를 무려 32년 만에 밟게 됐다.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처음 있는 일.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백지 상태에서 시작했다. 부딪히고, 깨지며, 익혀갔다.

■ 1편에 이어 계속(다시보기 클릭)


"아시아 유색 인종에 대한 견제가 정말 심했을 때예요. 멕시코를 갈 때 미국 환승 비자를 따로 받아야 했는데, 당시 그걸 몰랐던 이들이 꽤 됐어요. LA 공항에서 감시 대상으로 분류돼 발이 꽁꽁 묶이고 그랬죠. 돌아보면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받을 때부터 문제였어요. 뙤약볕에 수십 m씩 줄 서서 기다렸더니 '왜 월드컵이 있는 줄 알면서 이제야 신청하느냐'고 거절당했거든요. 그 담당자가 축구를 좋아했으니 망정이지(웃음). 폴 개스코인 얘기가 나와서 금세 대화가 통했죠. 그제야 도장 쾅 찍어주더군요." (이보상 당시 스포츠서울 기자, 멕시코 월드컵 현지 취재)




어수선했다. 1985년 11월 3일, 숙적 일본을 잡고 본선에 발 내딛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세계 대회까지 남은 기간이라곤 고작 반년. 선수단 구성부터 상대 분석까지 할 일이 태산이었다.

첨예하게 대립한 사안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서독에서 뛰던 차범근의 합류 여부.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자원이다' vs '예선을 함께하지 않아 조화를 해칠 수 있다'. 당시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의 UEFA(유럽축구연맹)컵 우승, DFB(독일축구연맹) 포칼 우승 등을 이끌며 '갈색 폭격기'로 떠오르고 있었다. 예선에서부터 불 붙었던 이 논쟁은 본선 확정 뒤 한층 심화됐다.

"金正男(김정남) 감독은 그동안 車範根(차범근) 영입에 따른 팀웍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다. 단, 車가 1개월 전 팀에 합류하여 합숙 훈련을 할 수 있다면 팀웍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보고 생각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車 영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金 감독이 생각을 급선회한 것은 지난 25일 崔淳永(최순영) 회장이 '車 선수를 부를 경우 뒤따르는 조건들은 모두 협회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확실한 태도를 밝혔기 때문이다."(<경향신문> 1985년 11월 27일 보도)

김정남 대표팀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반대 세력이 만만찮았으나, 12월 중순 월드컵 조 추첨 이후 곧장 차범근의 합류를 요청했다. 이에 최순영 대한축구협회장이 수락하며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82 스페인 월드컵 예선 무렵 차출이 이뤄지지 않았던 차범근은 1983년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할 당시 '월드컵에 진출할 경우 대표팀 소집에 응한다'라는 조항을 넣어 못 박아둔 상태였다.

"후배들 덕분에 월드컵을 한 번 뛰게 됐죠. 한 번 나가느냐, 못 나가느냐가 엄청난 차이인데, 그저 후배들한테 고마웠어요. 사실 78년~79년 독일로 나간 뒤로는 대표팀 소속으로 한 번도 못 뛰었어요. 서로 다른 축구를 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죠. 한국으로 올 수 있는 여건 역시 안 됐어요. FIFA(국제축구연맹) A매치 데이 같은 제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도 않았고, 그런 예선이 있어도 딱 3일만 내줬어요. 지금처럼 10시간 걸려 한국을 오갈 수 있던 것도 아니었거든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 파리, 앵커리지를 거쳐서 왔으니 23시간씩 걸렸어요. 당연히 몸이 다 퍼지죠.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보자는 다짐을 안고 귀국했어요."(차범근 현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대표팀 내 차범근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래도 차범근 선배가 합류한다면'이란 막연한 기대가 후배들 가슴 한 구석에 들어찼다. 만 33세. 지금과 달리 서른 줄만 진입해도 은퇴를 운운하던 시대다. 그랬던 차범근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 들었다.




첫 상대 아르헨티나에 대한 준비도 시작했다. 사실 마라도나 말고는 알지도 못했다. 그마저도 '엄청나게 잘하는 선수가 있구나' 정도. 냉정히 말해 유럽서 함께 뛰었던 차범근 말고는 이 괴물을 체감한 이가 없었다. 어느 축구인은 이렇게 돌아봤다. "영상 테이프도 없는데 분석은 무슨".

"기자들이 '마라도나 어떻게 잡을 거냐'고 워낙 많이 물어봤어요. 그래서 '투망 수비'로 묶겠다고 했었죠. 큰 그물을 던져 원형으로 퍼지게 하고 그 안에 들어온 물고기를 잡는 것이 투망이에요. 일정 지역을 설정해 이곳에 오기만 하면 서너 명의 선수가 에워싸자 했죠. 분석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요. 마라도나가 세계청소년선수권 대회에서 뛴 동영상을 조금 본 게 전부였죠. 스포츠 뉴스 같은 데 나온 거 간간이 접했고요."(김정남 현 한국 OB축구회 회장, 당시 축구대표팀 감독)

언론에서는 마라도나를 막을 적임자로 박경훈을 꼽았다. 1980년 한양대 재학생으로 첫 태극마크를 달았던 이 선수는 어느덧 20대 중반이 됐다. 경험 면에서 어느 정도 무르익었던 시기. 예측 불가능한 상대에게 붙여놓기에 적합하다는 분석이 따랐다.

"모두가 제게 마라도나를 잡아야 한다고 했어요. 스피드나 체격 면에서 다 맞다고 본 거지. 당시 <일간스포츠> 신문 1면에 내 사진을 엄청 크게 해놓고 키, 몸무게를 적어놓고 그랬어요. 신문 맨 앞은 아무나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마라도나 덕분에(웃음). 부상을 당해 몸이 안 좋았던 시기인데도 방에서 몸 키우려고 난리였어요. 그것 때문에 웨이트도 서너 달씩 했고요."(박경훈 현 전주대 축구학과 교수)

상황은 열악했다. 천연 잔디라고는 전국 통틀어 몇 없던 시절이다. 그나마 있던 잔디 구장도 보호 명목으로 맘껏 드나들지 못했다. 멕시코 땅을 밟기 전, 미국 콜로라도와 LA 등지를 거치면서 비로소 운동장에 대한 고민을 덜었다. 몇몇 동작에 대한 특별 훈련이 벌어졌다. 축구가 무슨 벼락치기도 아니건만.

"슬라이딩하면서 볼 걷어내는 태클 연습이 안 돼 있을 때예요. 우리는 다리를 넣어 딱딱 찍는 태클만 했죠. 그러다 미국 전지훈련 할 때 그런 훈련을 처음 했어요. 실내 체육관에서 (박)경훈이가 막 반복 동작 했던 게 아직도 참 선하네(웃음). 또, 내가 유럽에서 공 차며 배워온 웜업 같은 것을 가르쳐주면서 따라도 하고. 왜 이걸 해야 하는지 설명도 해보고. 그렇게 맞춰갔죠."(차범근 현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마라도나와 처음 만난 건 경기 당일이 아니었다. 아즈테카 경기장에서 열린 멕시코 월드컵 개막전. 대회 주최 측은 아르헨티나 바로 옆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좌석을 배정했다. 경기가 없는 국가들을 초청해 관전할 수 있게끔 했다.

이윽고 마라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대뜸 대표팀 좌석 쪽으로 걸어오는 것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차범근. 마라도나가 몸소 악수를 청했다. 다들 '역시 차 선배는 알아보는구나' 싶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모 대표팀 동료 또한 손을 내밀었다. 당황했던 마라도나. '응? 누구지?'란 표정을 지으며 휙 지나쳤다. 다들 자지러졌다.

경기 날 마라도나와 재회했다. 며칠 전 잠깐 조우했을 때와는 풍기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곰 같은 저 체구로 무슨 공을 차냐'던 의아함은 이내 아우라에 묻혔다. 복도에서 양 팀이 몸을 풀던 때다. 10번 유니폼을 입은 마라도나가 주장 완장을 차고선 떡 하니 등장했다.

이어 구령을 넣고 샤샥샤샥 움직였다. 나머지 선수단이 척척 뒤따랐다. 대표팀은 저 반대편 구석에서 각자 스트레칭을 해나갔다. 말 한마디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거기에서부터 기가 죽고 들어갔다.

"사실 축구 응원에 대한 개념도 희미했어요. 서포터즈의 광적인 모습도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거리 응원 같은 체계적인 활동은 2002 한일 월드컵 기점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 8만 관중이 모였다 해도 그것과는 체감 자체가 달랐어요. 여학생들이나 소소하게 소리를 지르던 미온적인 문화만 겪었는데, 멕시코 현지에 가니 다들 미쳐있더군요."(김주성 현 대한축구협회 심판실장)

"기자 6년 차였는데, 나부터도 그런 큰 경기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죠. 관중이 빼곡히 들어찼는데 그건 진짜. 덩달아 엄청 흥분했어요(웃음). 축구는 처음에 5분 정도 지켜보면 감이 오는 게 있는데, 개인 기량에서 벌써 압도당해버리니까. 우리는 내세울 수 있는 게 많이 없었어요. 그래도 다 같이 힘을 모아 주비했죠. 당시 배구, 태권도 지도자들이 멕시코에 진출해있던 때인데, 교민들과 합심해 김치도 날라줬고. 그런 지원을 많이 받았습니다."(이보상 당시 스포츠서울 기자, 멕시코 월드컵 현지 취재)

"나는 의외로 마라도나에 대한 생각이 딱히 없었어요. 평소 긴장하면서 경기 뛰는 스타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코칭스태프 해봤자 김정남 감독님, 김호곤 코치님 두 분이 전부셨고, 많은 정보를 알기 어려웠던 때죠. 그냥 축구 잘한다던 선수 몇 정도 들어본 게 전부니까. 운동장 들어가서 애국가 나오고 그럴 때 되니 좀 먹먹하더라고. 그때는 프로 선수로서 부와 명예를 누린다기보다는 애국심, 사명감으로 볼을 찬 시절이었으니까."(최순호 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전반 시작한 지 5분 만에 마라도나가 번쩍했다. 그리고 데굴, 데굴, ... 또 데굴. 총 다섯 바퀴를 굴렀다. 마라도나가 터치한 볼은 이미 뒤로 흘렀다. 막 돌진하려던 중 허정무가 뒤늦게 들이받았다. 예상치 못한 볼 처리였다. 공중볼을 지면에 잡아두리라 내다봤거늘, 무릎으로 쳐놓고 곧바로 달렸다. 과정을 생략해 템포를 극대화했다.

마라도나가 고통스러워하던 사이,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장본인 허정무는 억울하다는 듯 주심과 대화했다. 리플레이상 정통으로 맞은 것도 아니었다. 엄정히 말해 이때부터 슈퍼스타의 쇼맨십에 말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선제 실점이 나왔다. 마라도나가 왼발로 직접 쏜 슈팅이 수비 벽을 맞고 흘러나오자, 재차 머리로 연결했다. 발다노가 패스를 받았고, 슈팅 각도를 잡아 골망을 흔들었다.

이내 마라도나에게 첫 번째 맨투맨을 붙였다. 현대 호랑이의 김평석. 포지셔닝은 사실상 그라운드 전역에서 벌어졌다. 마라도나는 비단 공격 진영에서만 볼 잡은 게 아니라, 폭넓게 움직이며 대부분 과정에 관여했다.

전반 17분, 마라도나가 또다시 순간 속도를 올렸다. 삑. 야속하게 울려댄 휘슬에 속절없이 물러났다. 마라도나가 다시 프리키커로 섰다. 왼발로 올려준 볼이 루게리의 머리에 걸리면서 추가 실점을 헌납했다. 20분도 채 안 돼 당한 0-2 리드. 상황은 심각하게 흘렀다.

"그때 마라도나를 본 한국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17분 동안 마라도나가 만들어낸 게 차원이 달랐으니까요. 순식간에 3~4골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교를 하자면 '가장 좋은 날의 메시' 정도로 보고 싶어요. 물론 전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메시가 어떤 선수인지 알고, 어떻게 뛸지도 예상을 해요. 하지만 그때는 마라도나를 처음 겪었어요. 자주 볼 수 있는 선수도 아니었고. '가장 좋은 날의 메시'란 알고도 못 막는 놀라운 유형을 가리키는 건데, 마라도나가 당시 그랬어요. 준비가 안 돼 있었으니 충격은 더 컸죠."(한준희 현 KBS 해설위원)




'아차' 싶었다. 당시 허리가 안 좋았던 김평석이 마라도나를 완벽히 통제하기란 무리였다. 김용세를 두 번째 주자 삼았다. 반칙은 계속됐다. 원투 패스를 주고받으며 빠져나가는데 어찌나 빠르던지. 탄력마저 대단해 도저히 못 잡을 수준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잡고 늘어졌다. 삑! 삑! 주심도 바빠졌다.

"개인적으로 두 골 정도는 먹을 수 있다고 예상은 했지. 그런데 내용 자체가 완전히 말렸어요. 마라도나를 집중적으로 마크하다 보니 나머지 공간을 파악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수비한 것도 아니고. 다소 애매했지. 월드컵 분위기 자체를 몰랐으니 더 확실하게 대처할 능력도 부족했고. '왜 졌냐', '왜 골 먹었냐'는 판단할 여유조차도 없었죠."(조민국 현 청주대 감독)

앞이 캄캄했다. 꼬일 대로 꼬였다. 김정남 감독은 결국 승부수를 띄웠다. 전반 22분이란 다소 이른 시각에 첫 교체 카드를 빼 들었다. 등 번호 4번 조광래가 터치 라인 바로 앞에서 투입 지시를 기다렸다.

"두 골 먹고 나니 갑자기 '광래 준비! 광래 준비!' 하면서 급히 부르시는 거라(웃음). 속으로 '전반전은 버티겠지' 했는데, 골 연거푸 먹으면서 급해지신 거지. 다른 선수들 웜업 시작도 안 했는데, 나만 급하게 숨 올려서 들어간 거예요. 원래 훈련할 때는 내가 선발로 뛰기로 돼 있었어요. 주전으로 계속 뛰던 때니까. 그런데 마라도나라는 존재가 워낙 특별하다 보니 김평석을 먼저 마킹시켰죠. 당시 마라도나는 메시 이상의 폭발력이 있었어요. 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맨투맨으로 마라도나를 못 잡았다니까."(조광래 현 대구 FC 단장)


■ 총 세 편에 걸쳐 연재합니다. <3편>은 28일 업로드 예정.

사진=대한축구협회, 스포탈코리아 DB,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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