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인터뷰] '흑마신' 전병호 “별명? 지나고 보니 팬들에게 고마워”
입력 : 2021.02.25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대구] 김현서 기자= "당시에는 제 별명을 싫어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팬들에게 고맙더라고요"

야구에는 ‘흑마구’란 말이 있다. 구속은 느리지만, 타자들이 도저히 칠 수 없는 위력적인 공을 뜻한다. 흑마구를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있다. 평균 구속 120km대의 느린 공으로 상대 팀 타자들을 요리했던 ‘흑마신’, 바로 전 삼성 투수 전병호(48)다.

사실 전병호는 신인 때만 해도 그의 별명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투수였다. 1996년 삼성 입단 당시 최고 구속 147km/h, 평균 구속 140km/h대의 빠른 공을 가진 강속구 투수로 분류됐다. 그러나 데뷔 후 팔꿈치 부상을 입으면서 구속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통증을 참고 경기에 나서다 더는 강속구를 던질 수 없게 됐다. 그는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국 빠른 공을 포기했고 대신 변화구를 연마했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땀 흘리며 노력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불안했던 제구력도 안정적으로 바꿔 놓았다. 강속구는 잃었지만 완벽한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로 타자들을 제압했다. ‘흑마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2008년 현역 은퇴 이후, 전병호는 삼성과 kt에서 투수 코치로 활약하다 현재는 대구 달서구에서 B 리틀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황금 세대라 불리는 92학번 동기들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묵묵히 제 몫을 다하며 팀에 필요한 선수가 돼주었던 전병호 감독을 만나 근황을 물어봤다.



Q 2016시즌 끝으로 프로 무대를 떠나셨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2016년 kt에서 나오자마자 고향인 대구에 내려와서 리틀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Q. 프로 코치에서 유소년 지도자로 변신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프로에서 10년간 선수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유소년들을 지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로 선수들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입단하는데 어린 선수들은 아무래도 기초가 중요하잖아요. 성장하면서 좋은 기술을 갖고 있어야 경쟁력이 생기고요. 던지는 힘보다는 투구 밸런스에 중점을 맞춰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Q. 프로 무대로 복귀하실 생각이나 계획은 없으신가요?

“처음에는 있었어요. 리틀 야구단 지도자를 몇 년 하다가 기회가 되면 마지막으로 프로 코치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솔직히 딱 까놓고 반반입니다. 현재 리틀 야구단 선수들을 잘 지도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잠시 보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Q. 지도한 프로 선수 중에서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지금 한화에 있는 장시환 선수. kt코치 시절에 장시환 선수를 지도했는데 정말 열심히 하더라고요. 제가 밤늦게까지 (시간을) 허비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잘됐으면 했는데 지금 한화에서 선발로 자리를 잡아서 뿌듯해요.

그리고 박세웅 선수. kt에 신인으로 입단했을 때 제가 힘들게 운동을 시켰거든요. 그런데도 군소리 한번 안 하고 잘 따라오더라고요. 그래서 얘는 잘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롯데로 트레이드되더라고요. 신생팀에서 투수 하나를 만들어 내기까지 정말 힘든데, 이 좋은 선수를 트레이드로 보내니까 당시 투수코치로서 마음이 좀 많이 아팠어요. 지금은 롯데에 가서 10승도 하고, 야구를 잘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참 좋습니다.”



Q. 이번엔 감독님의 선수 시절 이야기를 해볼게요. 12년간 삼성에서 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우선, 남들처럼 슈퍼스타 정도는 아니었지만, 팀에 꼭 필요한 선수로 기억해 주셔서 팬들한테 감사드리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02년도에 삼성이 21년인가? 22년 만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인 것 같아요. 그때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제가 바람막이 선발을 했거든요. 군 제대 후, 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던졌는데 삼성이 이겨서 좋았고요. 제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경기였어요.”

Q. 감독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흑마구’와 ‘흑마신’인데, 이 별명을 엄청 싫어하셨다고 들었어요.

“네. 그 소리를 정말 싫어했어요. 당시에 구속이 안 나와서 그런 별명이 붙여진 거잖아요. 롯데한테 잘해서 좋은 의미로 지어주신 것도 있지만요. 그래도 제가 (신인 때는) 강속구 투수였는데 (부상으로) 스피드가 떨어지고 그 소리를 들으니까 자존심이 많이 상하더라고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제 이름 석 자 옆에 ‘흑마신’ 이라는 별명이 남아있더라고요. 팬들한테 너무 고마워요.”


Q. 구속이 저하된 정확한 원인은 뭐였나요?

“신인 때는 최고 147km/h 정도까지 던질 거로 기억해요. 평균적으로는 한 140km/h대 정도였고요. (선수 생활) 중간에 팔꿈치 부상을 입은 뒤부터 구속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지금 여기서) 팔꿈치를 보여드릴 수는 없는데, 제가 지금 장애인 5급이에요. 팔이 많이 휘어져서 오른손은 어깨에 닿는데 왼손은 안 닿거든요. 두 손으로는 세수를 못 해요.

당시에는 아프다고 하면 나이가 있어서 2군으로 내려가거나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 계속 주사를 맞고 던졌어요. 그러다 보니까 팔꿈치 연골 부분이 다 녹아서 없어져 버렸고, 어느 순간 스피드가 안 나오더라고요. 이 상태로 공을 계속 던지면 경쟁력이 없어지니까 강속구 투수의 미련을 버리고 그때부터 변화구를 개발해서 훈련했어요”

Q.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롯데 천적이셨잖아요. 로나쌩(롯데 나오면 땡큐) 클럽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초대 회장으로 불리는 성준 감독님과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으신가요? (웃음)
(*전병호는 96년 중반부터 06년도 중반까지 10년 동안 롯데를 상대로 무패 행진을 달리며 12연승을 기록한 바 있다. )


“대충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실 거예요. (로나쌩에 대해) 관심이 많이 있는 건 아니고요. 팬들이 단계별로 회장, 부회장을 정해놓았는데.(웃음) 뭐, 웃자고 만든 거잖아요! 그리고 회장은 유희관이 돼야 정답이고요.(웃음)”

Q. 롯데한테 유독 강했던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생각해도 롯데하고 할 때는 게임이 잘 풀렸어요. 어떤 점이 있었느냐면 카운트 볼이나 제가 버리는 공들을 롯데 선수들이 많이 건드려서 아웃 되더라고요. 컨디션 안 좋을 때는 팀 타선이 점수를 내주기도 했고요. 롯데전만 되면 제가 편하게 게임을 하다 보니까 1년에 2~3승씩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롯데한테 고마워요. 당시에 이대호 선수 등 잘 치는 타자가 많았는데도 유독 저한테 약했던 것 같아요.”

Q. 그렇다면 롯데 선수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타자는 누구였나요?

“지금 삼성에서 뛰고 있는 이원석 선수. 저보다 한참 어린 후배인데 이원석 선수가 ‘선배님 공은 아무 생각 없이 쳐도 다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기록을 보니까 정말 제 볼을 잘 쳤더라고요. 한 시즌에 15타석 13안타 정도? 제 공을 너무 잘 치니까 얘가 나오면 ‘빨리 쳐라! 네가 살아나가면 병살로 잡아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냥 한가운데에 던졌어요.”


Q. 아카데미 벽에 이승엽 선수 사인이? 선수 시절에 이승엽 선수의 사인을 많이 연습하셨다는데?

“승엽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잖아요. 사인을 몇백 개씩 해야 하니까 힘들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사인을 따라 해봤는데, 비슷하더라고요. (현역 때) 술자리에 가면 친구들이 저한테 사인해달라고 해요 그때 ‘내 사인은 크게 값어치가 없다, 이승엽 사인이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재미로 사인했는데 많이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이 뒤(아카데미 벽)에도 제가 승엽이 사인을 해놓은 거예요.”

Q.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프로 선수는 팬들의 사랑으로 존재한다고 봐야 하는데 제가 야구 잘했든 못했던 그 당시 저를 응원해 주셨던 팬들에게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욕하셨던 분들도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가 잘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팬 여러분도 옛날처럼 삼성을 많이 사랑해주세요. 마지막으로 항상 건강하시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사진= 뉴시스
영상 편집= 전수연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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