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LEGEND] 아시아 축구 강자 버마의 영광
입력 : 2013.09.21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1962년 이후 45년 이상 이어진 군부의 철권통치, 이에 항거하는 시민과 승려들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 군대와 경찰 실탄 발사로 유혈 진압, 일본인 사진기자 등 10여 명 사망. 동남아시아 중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미얀마의 이야기다.

미얀마는 1988년에도 승려와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군사정권은 총탄으로 맞서 3,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어떤 나라이기에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에 군인과 경찰이 20년 새 두 번이나 실탄을 발사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세계 각국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다. 그러나 축구인들에게는 ‘미얀마’ 하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아련한 추억이 있다. ‘미얀마’라는 이름보다 더 친근한 ‘버마 축구’. 올드팬들에게는 지금도 그 때의 ‘버마 축구’가 머릿속 필름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미얀마는 당시엔 ‘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나라였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의 형편이 미얀마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회택, 차범근이 최고인 줄 알았던 축구 팬들은 이따금 한국 대표팀이 버마 대표팀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장면을 자주 지켜봐야 했다.

한국도 군사정권이 지배하던 1972년 9월 27일 저녁. 서울 동대문운동장에는 3만명의 관중이 꽉 들어찼다. 서울, 부산은 물론 전국의 단독주택 앞마당 흑백TV 앞에도 동대문운동장만큼이나 많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 숨죽이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2회 박스컵 국제축구대회 준결승, 한국과 버마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몽몽틴, 몽애몽 등 유달리 ‘몽’가 들어간 이름이 많은 버마 대표팀은 전반 23분 몽예뉜이 날린 25m 중거리 슛 한방으로 차범근이 공격을 주도한 한국 대표팀을 1-0으로 이겼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한국이 만든 국제대회에서 결승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전후반 90분 경기가 끝났을 때 흑백TV로 이를 지켜보던 많은 축구팬들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눈물을 흘린 사람은 동대문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박스컵 국제축구대회는 당시 우리나라를 철권통치 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을 딴 ‘박정희 대통령배 아시아 축구대회'를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영문으로 표기하면 ‘Park’s Cup’이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꼭 10년이 지난 1971년 아시아 축구대회를 만들었다. 직접 순금을 하사해 대통령배를 만들게 하여 우승팀에게 주도록 한 것이다.

당시 한국보다 잘 살던 말레이시아는 ‘메르데카컵’ 아시아 축구대회를 1958년부터, 또 태국은 왕배로 불리던 ‘킹스컵’ 축구대회를 1968년부터 개최하고 있었다. 한국 대표팀은 1960년 제3회 메르데카컵, 1969년 제2회 킹스컵을 처음으로 따왔다.

비록 라디오 중계지만 청취률이 엄청나게 높았고 우승이라도 하면 카 페레이드는 기본이었다. 현재의 한국 축구는 프로 1,2부 리그도 만들어 지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4강에도 오르는 세계적인 팀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1960~70년대에는 ‘아시아 우물 속의 개구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제축구대회’를 하나 만들어 한국의 발전상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 만든 것이 박스컵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1회 박스컵 개막식이 열린 1971년 5월 2일 동대문운동장을 찾아 한국 대 태국의 대회 개막전 경기에 앞서 시축을 하기도 했다.

한국은 1971년 5월13일 열린 버마와 결승에서 연정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으나 0-0으로 비기는 바람에 이틀 뒤 재경기를 치른 끝에 모두 비겨 공동우승 했다. 한국으로서는 겨우 체면은 지킨 셈이었다.

하지만 다음해인 1972년 9월에 열린 제2회 대회 준결승에서 그만 버마에 져 결승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청와대에서 같은 시간에 흑백TV로 경기를 지켜보았을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은 어땠을
까. 아마 국민이나 축구팬보다 가슴이 더 아팠을 것이다.

버마가 한국 축구에 안긴 아픈 기억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다음 해 또 일어났다. 그것도 1년전과 똑같은 박스컵에서 말이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73년 9월 28일 준결승에서 또 버마를 만났다. 그런데 전반 30분 버마는 몽애몽의 센터링을 받은 몽틴윈이 헤딩 슛을 성공시켜 한국을 또 1-0으로 울려버렸다.

‘공수 리더 없고, 링커도 불안’이라는 제목이 대부분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모 일간지는 ‘우왕좌왕한 수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노장 기용으로 활로 찾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국 축구의 버마 악몽은 1973년 9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국은 그해 12월 22일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열린 킹스컵 4강전에서 버마를 2-0으로 이겨 3개월 전 패배를 설욕했다. 또 1974년 5월 박스컵 4강전에서 3-0, 1975년 5월 결승전에서 1-0으로 이겨 한국 축구는 완전히 ‘공 버마증’에서 벗어났다.

이후 2004년 4월 아시안컵 예선에서 미얀마(1989년부터 나라 이름이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뀜)를 4-0으로 이길 때까지 버마에 한 번도 지지 않았다.

1954년 이후 통산 전적에서도 한국은 25전 13승 7무 5패로 훨씬 앞섰다. 그러나 버마는 박스컵 이전에도 고비 때마다 한국 축구를 울렸다. 1966년 8월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 대회에서 한해 전 우승을 한 한국은 버마에 2-0으로 져 3-4위전으로 밀려났다. 그해 12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0-1으로 패해 예선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한국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도 예선전에서 버마에 0-1으로 졌다. 다행히 결승에서 다시 맞붙어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비겨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축구를 호령하던 호랑이는 버마에는 아직도 귀에 익숙한 몽몽틴, 몽몽A, 몽애몽, 몽예뉜, 몽윈몽, 몽틴몽, 몽틴쉔 등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이 활약하며 아시아무대에서 많은 우승을 일궈내며 아시아축구 맹주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버마는 박스컵 원년대회부터 3회대회까지 몽몽틴, 몽몽A, 몽애몽, 몽예뉜, 몽윈몽, 몽틴몽, 몽틴쉔 등을 앞세워 3연패(제1회 한국, 제3회 크메르 공동우승 포함)의 위업을 달성하며 버마 축구의 위용을 과시했다.

버마가 박스컵 3연패를 이룩하는 데에는 약 170Cm 안팎의 신장을 가지고 있던, 몽몽틴, 몽몽A, 몽애몽, 몽예뉜, 몽윈몽, 몽틴몽, 몽틴쉔 같은 선수들이 구사하는 화려한 개인기와 정확한 패스 그리고 빠른 움직임에 의한 신속한 플레이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이들은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평가 받았다. 그러나 몽몽틴, 몽몽A, 몽애몽, 몽예뉜, 몽윈몽, 몽틴몽, 몽틴쉔 등과 같은 선수들이 은퇴를 하면서 버마 축구는 쇠락의 길을 걸었고 현재까지 40여 년간 아시아 무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이제 버마 축구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기지개를 켜고 있다. 버마는 1인당 국민 소득이 약 800달러로 유엔이 정한 최빈국 중 한 국가이지만, 국민들의 축구에 대한 열기는 세계 그 어느 국가보다도 뒤지지 않는다. 이 같은 열기는 마침내 2009년 프로축구를 출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버마가 아시아축구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 상태에서 축구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 일본, 호주, 이란, 카자흐스탄 등이다. 버마 축구가 프로축구 출범을 발판으로 다시 옛 영광을 되찾는다면, 상호 치열한 경쟁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아시아 축구 발전은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기대된다.

버마는 군사정권에 의해 자유가 보장받지 못해 이로 인하여 축구도 많은 제약을 받으면서 발전이 정체된 채,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도 190~200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아울러 대표 선수 출신도 돈벌이를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을 만큼, 아직까지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버마축구 영광재현과, 몽몽틴, 몽몽A, 몽애몽, 몽예뉜, 몽윈몽, 몽틴몽, 몽틴쉔 등과 같은 동양의 스타플레이어 탄생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버마는 황금 빛이 넘실대는 동양의 신비 국가다. 축구 역시도 신비스러움 속에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버마 축구의 영광 재현은 미래진행형이어서 기대감이 크다.


글=김병윤 (전 군산제일고 감독)
사진=한국축구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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