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1977년 연세대 축구부 주장 S는 술고래였다. 원래 술을 좋아했지만 주장을 맡은 뒤 오히려 술과 가까이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동기인 국가대표 조광래 허정무 박종원 등은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데 숙소를 지켜야 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달랠 수 있는 데는 오직 술이 최고였다. 여기에 동병상련의 L까지 좋은 술친구로 등장하면서 거의 매일 밤 술판을 벌였다.
S는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장운수 감독이 자신을 대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이장수 신문선 등 내로라하는 후배들의 성장도 S로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주장 S가 거의 매일 밤 술타령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장운수 감독 귀에 안 들어갈 리 없었다. 장운수 감독은 S의 술타령을 고치기 위해 어느 날 숙소에서 현장을 잡기로 하고 S의 자리에 누워서 기다리다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이날도 거나하게 취한 S는 갈지자 걸음이지만 용케도 숙소의 자기 방을 찾아왔다. 옷을 벗는 둥 마는 둥 한 S는 자기 자리에 누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떤 ××가 겁 없이 주장 자리에서 자는 거야”하며 축구선수답게 발길질을 해댔다.
졸지에 발길질을 당한 장운수 감독은 당장이라도 이불을 들치고 나가 S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S가 몇 차례 발길질을 해대다 술에 취해 제풀에 쓰러져 잠이 든 뒤에야 장 감독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조용한 밤하늘을 올려다 본 장운수 감독은 제자의 술버릇을 고치려다 오히려 발길질을 당한 것을 생각하고는 분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이튿날 새벽훈련에 평소보다 일찍 나온 장운수 감독은 체조와 조깅, 그리고 스트레칭을 하던 평소 훈련과 달리 간단한 체조에 이어 운동장 50바퀴를 돌도록 했다.
간밤에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S는 숨이 턱까지 찼고 하늘이 노래졌다. 장운수 감독이 별다른 설명 없이 운동장 50바퀴를 돌도록 하는 것을 보고 저학년 선수들은 간밤에 선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술에 얽힌 사연은 고등학교 축구부 숙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북한산을 뒤로 한 경신고 축구부 숙소는 기독교학교답게 전통적으로 분위기가 엄숙하고 잘 정돈돼 있다.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를 역임한 김진국이 주장이던 1960년대 말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김진국이 3학년이던 1969년, 2학년에는 노익균, 1학년에는 차범근이 있어 경신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김진국은 밤늦도록 운동을 하면서도 주장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후배 챙기기에 남달랐다.
김진국은 후배들이 외출하면 모두 돌아온 뒤에야 잠을 잘 정도로 자상했지만 잘못할 때는 무서운 호랑이만큼 후배들에게 엄했다. 160㎝대 비교적 단신인 김진국은 키가 비슷한 노익균과 별도의 개인훈련을 많이 했는데 2대1 월 패스 후 하는 슈팅훈련에서 슈팅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 우직한 차범근의 숙소생활은 오직 축구뿐으로 이들의 개인훈련에 자주 합류했다.
아무리 학교 분위기가 엄숙하고 잘 정돈돼 있다 해도 말썽꾸러기는 있게 마련으로 노익균이 그 주인공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의 어느 날, 제천 고향친구 서너명이 사고를 치고 노익균이 생활하고 있는 경신고 축구부 숙소를 찾아왔다. 고향친구들의 하소연을 들으며 저녁식사를 하다가 자연스레 소주잔이 오갔고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하던 노익균은 금세 취하고 말았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친구들과 헤어져 숙소로 향한 노익균은 학교 분위기 때문에 술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다리는 꼬이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주장 김진국과 같은 방을 사용한 노익균은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들어와 벽에 박아놓은 못에 옷을 걸어놓으려 했지만 키가 작아 걸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발에 밟히는 것이 있어 그것을 밟고 옷을 걸었다. 그런데 그것이 김진국의 머리였다. 머리를 밟히는 바람에 놀라서 벌떡 일어난 김진국은 노익균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대자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노익균은 좌우상하에서 날라오는 김진국의 펀치와 발차기 세례를 받자 정신이 번쩍 났다. 김진국으로부터 원 없이 맞은 노익균은 그 뒤 김진국이 졸업할 때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동기인 국가대표 조광래 허정무 박종원 등은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데 숙소를 지켜야 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달랠 수 있는 데는 오직 술이 최고였다. 여기에 동병상련의 L까지 좋은 술친구로 등장하면서 거의 매일 밤 술판을 벌였다.
S는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장운수 감독이 자신을 대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이장수 신문선 등 내로라하는 후배들의 성장도 S로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주장 S가 거의 매일 밤 술타령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장운수 감독 귀에 안 들어갈 리 없었다. 장운수 감독은 S의 술타령을 고치기 위해 어느 날 숙소에서 현장을 잡기로 하고 S의 자리에 누워서 기다리다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이날도 거나하게 취한 S는 갈지자 걸음이지만 용케도 숙소의 자기 방을 찾아왔다. 옷을 벗는 둥 마는 둥 한 S는 자기 자리에 누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떤 ××가 겁 없이 주장 자리에서 자는 거야”하며 축구선수답게 발길질을 해댔다.
졸지에 발길질을 당한 장운수 감독은 당장이라도 이불을 들치고 나가 S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S가 몇 차례 발길질을 해대다 술에 취해 제풀에 쓰러져 잠이 든 뒤에야 장 감독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조용한 밤하늘을 올려다 본 장운수 감독은 제자의 술버릇을 고치려다 오히려 발길질을 당한 것을 생각하고는 분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이튿날 새벽훈련에 평소보다 일찍 나온 장운수 감독은 체조와 조깅, 그리고 스트레칭을 하던 평소 훈련과 달리 간단한 체조에 이어 운동장 50바퀴를 돌도록 했다.
간밤에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S는 숨이 턱까지 찼고 하늘이 노래졌다. 장운수 감독이 별다른 설명 없이 운동장 50바퀴를 돌도록 하는 것을 보고 저학년 선수들은 간밤에 선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술에 얽힌 사연은 고등학교 축구부 숙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북한산을 뒤로 한 경신고 축구부 숙소는 기독교학교답게 전통적으로 분위기가 엄숙하고 잘 정돈돼 있다.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를 역임한 김진국이 주장이던 1960년대 말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김진국이 3학년이던 1969년, 2학년에는 노익균, 1학년에는 차범근이 있어 경신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김진국은 밤늦도록 운동을 하면서도 주장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후배 챙기기에 남달랐다.
김진국은 후배들이 외출하면 모두 돌아온 뒤에야 잠을 잘 정도로 자상했지만 잘못할 때는 무서운 호랑이만큼 후배들에게 엄했다. 160㎝대 비교적 단신인 김진국은 키가 비슷한 노익균과 별도의 개인훈련을 많이 했는데 2대1 월 패스 후 하는 슈팅훈련에서 슈팅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 우직한 차범근의 숙소생활은 오직 축구뿐으로 이들의 개인훈련에 자주 합류했다.
아무리 학교 분위기가 엄숙하고 잘 정돈돼 있다 해도 말썽꾸러기는 있게 마련으로 노익균이 그 주인공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의 어느 날, 제천 고향친구 서너명이 사고를 치고 노익균이 생활하고 있는 경신고 축구부 숙소를 찾아왔다. 고향친구들의 하소연을 들으며 저녁식사를 하다가 자연스레 소주잔이 오갔고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하던 노익균은 금세 취하고 말았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친구들과 헤어져 숙소로 향한 노익균은 학교 분위기 때문에 술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다리는 꼬이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주장 김진국과 같은 방을 사용한 노익균은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들어와 벽에 박아놓은 못에 옷을 걸어놓으려 했지만 키가 작아 걸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발에 밟히는 것이 있어 그것을 밟고 옷을 걸었다. 그런데 그것이 김진국의 머리였다. 머리를 밟히는 바람에 놀라서 벌떡 일어난 김진국은 노익균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대자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노익균은 좌우상하에서 날라오는 김진국의 펀치와 발차기 세례를 받자 정신이 번쩍 났다. 김진국으로부터 원 없이 맞은 노익균은 그 뒤 김진국이 졸업할 때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