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서울 올림픽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88년 11월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소재 캐피탈호텔 기자회견장. ㈜ 통일스포츠 곽정환 사장은 보도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소 흥분된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프로스포츠를 통해 민족 체육진흥에 기어코자 프로축구 팀을 창단키로 했습니다.” 프로축구 제6구단 일화팀 창단을 대외에 공식적으로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로부터 108일 뒤인 1989년 3월18일 일화팀은 쉐라톤워커힐에서 창단식을 갖고 프로축구 제6구단으로 정식 출범했다. 창단멤버는 유공에서 이적해 온 ‘키다리’ 김용세 등 29명, 초대 코칭스태프는 박종환 감독과 원흥재 코치, 이장수 트레이너로 짜여졌다. 마스코트는 성스럽고 정의와 높은 기상, 기동력을 상징한다는 전설적인 동물 ‘천마’를 택했다.
일화는 한 때 서독 프로축구 분데스리가 팀 인수를 검토했었고 프로팀 창단 계획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프로축구가 출범된 지 5년이 지나서야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기독교신자인 최순영 회장이 통일교 재단의 일화팀 창단을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일화팀 창단이 대한축구협회 집행부가 최순영 회장에서 김우중 회장 체제로 바뀐 뒤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것도 이 까닭이었다.
아무튼 ‘천마 일화’의 창단은 제6구단 창단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국내 프로축구계로서는 ‘오랜 가뭄 속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제6구단 창단은 축구계의 가장 큰 현인이었고 프로위원회 유흥수 초대 회장의 공약1호 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호남기업 연합팀의 창단 작업이 막판 지분 조정 단계에서 깨지는 아쉬움을 남긴 이래 전혀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때여서 축구계의 크나큰 환영을 받았다. 특히 일화는 팀 창단과 때를 맞춰 ‘장밋빛 청사진’을 밝혀 축구계를 들뜨게 했다.
곽정환 사장은 창단식에서 “체육부 및 대한축구협회와 협의, 1998년 월드컵을 한국에 유치토록 하겠다.”고 밝히면서 “일화의 해외 조직을 총동원, 유치 경쟁에 나선다면 좋은 결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곽사장은 또 “월드컵 개막식과 결승전을 치를 메인스타디움을 일화가 건설하고 월드컵이 끝나면 일화의 홈구장으로 사용하겠다.”는 거창한 발표로 일화 창단이 축구계에 새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박종환 감독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끌어들인 것도 주목을 끄는 대목이었다. 일화는 1988년 9월15일 축구단 창단인가 신청을 하기가 무섭게 같은 날 ‘그라운드의 승부사’ 박종환 감독과 정식 계약을 했는데 계약 총액이 1억4,800만원, 이밖에 상당액의 판공비와 승용차 제공으로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일화는 박종환 감독의 지도능력을 높이 평가해 세금을 일화측이 부담하고 계약금 1억 원, 연봉 4,800만 원으로 정했으며 그 외에 상당한 수준의 판공비와 2,000 cc급 승용차를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당시 현역 축구감독 중 가장 늦게 취임한 현대 김호 감독이 계약금 6,000만원, 연봉 3,000만원으로 최고 수준이었다.
숱한 화제와 기대 속에 1989년 출범한 일화는 데뷔 첫해 박종환 감독 특유의 ‘화끈한 공격 축구’로 돌풍을 일으켰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프로스포츠를 통해 민족 체육진흥에 기어코자 프로축구 팀을 창단키로 했습니다.” 프로축구 제6구단 일화팀 창단을 대외에 공식적으로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로부터 108일 뒤인 1989년 3월18일 일화팀은 쉐라톤워커힐에서 창단식을 갖고 프로축구 제6구단으로 정식 출범했다. 창단멤버는 유공에서 이적해 온 ‘키다리’ 김용세 등 29명, 초대 코칭스태프는 박종환 감독과 원흥재 코치, 이장수 트레이너로 짜여졌다. 마스코트는 성스럽고 정의와 높은 기상, 기동력을 상징한다는 전설적인 동물 ‘천마’를 택했다.
일화는 한 때 서독 프로축구 분데스리가 팀 인수를 검토했었고 프로팀 창단 계획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프로축구가 출범된 지 5년이 지나서야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기독교신자인 최순영 회장이 통일교 재단의 일화팀 창단을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일화팀 창단이 대한축구협회 집행부가 최순영 회장에서 김우중 회장 체제로 바뀐 뒤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것도 이 까닭이었다.
아무튼 ‘천마 일화’의 창단은 제6구단 창단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국내 프로축구계로서는 ‘오랜 가뭄 속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제6구단 창단은 축구계의 가장 큰 현인이었고 프로위원회 유흥수 초대 회장의 공약1호 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호남기업 연합팀의 창단 작업이 막판 지분 조정 단계에서 깨지는 아쉬움을 남긴 이래 전혀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때여서 축구계의 크나큰 환영을 받았다. 특히 일화는 팀 창단과 때를 맞춰 ‘장밋빛 청사진’을 밝혀 축구계를 들뜨게 했다.
곽정환 사장은 창단식에서 “체육부 및 대한축구협회와 협의, 1998년 월드컵을 한국에 유치토록 하겠다.”고 밝히면서 “일화의 해외 조직을 총동원, 유치 경쟁에 나선다면 좋은 결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곽사장은 또 “월드컵 개막식과 결승전을 치를 메인스타디움을 일화가 건설하고 월드컵이 끝나면 일화의 홈구장으로 사용하겠다.”는 거창한 발표로 일화 창단이 축구계에 새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박종환 감독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끌어들인 것도 주목을 끄는 대목이었다. 일화는 1988년 9월15일 축구단 창단인가 신청을 하기가 무섭게 같은 날 ‘그라운드의 승부사’ 박종환 감독과 정식 계약을 했는데 계약 총액이 1억4,800만원, 이밖에 상당액의 판공비와 승용차 제공으로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일화는 박종환 감독의 지도능력을 높이 평가해 세금을 일화측이 부담하고 계약금 1억 원, 연봉 4,800만 원으로 정했으며 그 외에 상당한 수준의 판공비와 2,000 cc급 승용차를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당시 현역 축구감독 중 가장 늦게 취임한 현대 김호 감독이 계약금 6,000만원, 연봉 3,000만원으로 최고 수준이었다.
숱한 화제와 기대 속에 1989년 출범한 일화는 데뷔 첫해 박종환 감독 특유의 ‘화끈한 공격 축구’로 돌풍을 일으켰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