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차범근이 분데스리가를 떠난 지 24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독일의 많은 축구팬들은 한국하면 차범근부터 떠올린다. 분데스리가에서 쌓아온 차범근의 업적은 그만큼 위대하다. 한 평생 축구 현장을 누빈 축구전문대기자의 낡은 취재수첩을 펼쳐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족적을 되짚었다.
축구선수 차범근에게 강한 인상을 처음 받은 때는 시골의 한 작은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1976년 초가을이었다.
한국은 1976년 9월 11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6회 박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 개막전에서 말레이시아와 대결했다. 말레이시아에는 수비의 명장 소친온과 거미처럼 많은 발을 가지고 빈틈없이 볼을 잡아낸다는 아르무감, 높은 득점력을 자랑하는 목타르 다하리가 있었다.
한국의 화랑은 말레이시아의 전력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던 만큼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공격을 펼쳤다. 그러나 이날 따라 골키퍼 김진복과 수비수 김철수, 김호곤의 호흡이 이상할 정도로 맞지 않았다. 수비수가 김진복에게 백패스 한다는 것이 말레이시아 선수에게 차단당하면서 1골을 빼앗기더니 연속해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했다. 그때마다 말레이시아는 득점과 연결시킴으로써 스코어는 눈 깜짝할 사이에 0-3으로 벌어졌다. 한국은 후반전에 전열을 가다듬어 박상인이 1골을 만회했으나 곧이어 목타르 다하리의 번개 같은 중거리 슛에 또 한골을 잃으면서 1-4로 여전히 3골 차로 뒤지고 있었다.
동대문운동장 좌측 스탠드에 설치된 전광판의 시계가 정확하게 7분을 남겨 놓은 시간에 차범근이 연출하는 기적 같은 드라마가 시작됐다.
차범근의 움직임은 마치 숲 속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자던 표범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한 차례 기지개를 한 뒤에 먹이를 향해 사납게 돌진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포진한 차범근이 포효하면서 적진을 헤집은 뒤 강하게 때린 볼이 그대로 말레이시아의 골문을 꿰뚫었다. 실의와 환멸에 빠졌던 스탠드의 관중석에서 약간의 박수소리가 터졌다. 멋진 플레이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으로 한국이 패배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박수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시 4분이 경과했을 무렵. 차범근의 발끝을 떠난 볼이 또 한 번 골네트를 흔들었다. 스탠드의 박수소리는 이전보다 커졌고, 경기종료 1분전 말레이시아 수비수가 시간을 끌기 위해 이리저리 드리블하는 것을 차단한 차범근의 발길이 번쩍하고 섬광을 터트렸다.
골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 소리보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더 크고 빨랐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적의 드라마가 차범근이라는 단 한 명의 활약으로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7분 드라마’가 펼쳐진 이듬해인 1977년 필자는 현대경제일보사(한국경제신문 전신)에 입사, 천직이 된 기자가 됐고 차범근은 공군에 입대하여 여전히 표범의 모습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1979년 10월 편집부에서 문화체육부로 발령을 받았을 때 아쉽게도 차범근은 한국을 떠나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차범근을 서독에서 만난 것은 1986년 2월이었다. 32년 만에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 대표팀은 독일 뒤스부르크에 훈련캠프를 차리고 해외 전지훈련을 하고 있었다. 8년 만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차범근도 이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레버쿠젠 집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필자는 뒤스부르크 캠프로 가기 전 차범근과 하루를 같이 지낼 수 있었다.
차범근의 하루는 축구의 하루였다. 축구를 하기 위해 눈을 떴고 축구를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훈련과 경기는 물론 식사를 하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조차도 축구를 위한 것이었다.
197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시도된 차범근의 서독행은 '국보 유출'이라는 세간의 여론으로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고심 끝에 축구협회는 차범근의 서독행을 공식적으로 허가했지만 정작 서독 땅을 밟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차범근은 1978년 12월 25일 다름슈타트 유니폼을 입고 보쿰을 상대로 독일 분데스리가에 첫 선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10년이나 이어질 '차붐'과 분데스리가의 긴 인연을 매개해줄 둥지는 다름슈타트가 아니었다. 차범근은 한 경기만을 치른 뒤 일단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병역 문제 등 서독 진출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하는 관문들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큰 소득도 있었다. 차범근은 보훔전에서 현지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활약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반년 뒤 성공적으로 분데스리가에 안착할 수 있었다.
차범근이 다름슈타트가 아닌 분데스리가의 다른 팀으로 가게 될 가능성은 귀국 직후부터 제기됐다. 다름슈타트와 계약 조건과 병역 문제 해결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차범근이 갈 수 있는 팀으로 가장 유력하게 떠오른 곳이 그의 실질적인 첫 친정이 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였다.
차범근은 1979년 5월 31일자로 공군에서 만기 제대했다. 이제 자유롭게 서독에 갈 수 있는 신분이 됐다. 서독행은 기정사실이 됐고 어떤 팀에서 뛰느냐가 관심이었다. 차범근 개인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계약을 맺고 있던 다름슈타트가 1978/1979시즌에 2부리그로 강등됐다는 점이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다름슈타트와 계약 관계를 성실하게 지키지 못했던 차범근은 2부 강등을 계기로 자유롭게 새로운 팀을 고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차범근은 팀이 정해지지 않은 관계로 보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얘기가 안 나왔으나 차범근의 서독행을 주선한 바듀즈 측은 일본의 오쿠데라보다는 더 많은 보수를 받도록 동분서주했다. 오쿠데라가 FC 쾰른과 계약할 때 받은 돈은 2년간 총액으로 25만 마르크였다. 당시 환율로 약 7,000만원이었다.
차범근의 서독행이 확정되자 대한축구협회는 그가 그 동안 한국축구 발전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해 국내무대 고별전을 특별히 마련했다. 1979년 6월17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연고대 OB전이었다. 차범근은 대학 시절 입었던 붉은 줄무늬의 고대 유니폼을 입고 국내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연고 OB전을 보려고 모여든 관중이 3만 명을 넘었다. 개회식이 진행되는 시간 본부석에서는 "지금 이 자리에는 여러분의 총애를 받아오던 차범근 선수가 나와 있습니다"하고 마이크로 소개했으며 차범근이 두 손을 쳐들고 앞뒤로 한 바퀴 도는 순간 스탠드의 박수와 함성은 그야말로 천지를 진동하는 듯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차범근이 볼을 잡기만 하면 스탠드의 박수와 함성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반드시 훌륭한 축구를 배워서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차범근은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언제나 여러분의 성원과 사랑이 나를 밀어 준다고 믿기에 마음 든든하게 뛰겠습니다." 차범근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역시 한국 땅이며 한국의 축구팬이기에 그는 고별사의 마지막 말에 "국내 축구팬의 사랑에 반드시 보답하겠다"는 말을 거듭 되풀이했다.
소속팀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차범근은 6월 22일 서울을 떠나 독일 쾰른으로 향했다. 재서독한국인축구협회장 한일동씨 집에 기거하면서 분데스리가 진입을 위한 마지막 수순에 들어갔다. 훈련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름슈타트와 관계를 말끔히 정리한 차범근은 이제 최종 관문을 앞두고 있었다. 기회의 땅 독일을 찾은 동양의 젊은 선수에게 가장 먼저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낸 곳은 바로 SV 베르더 브레멘이었다. 브레멘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은 것은 7월 11일이었다. 차범근이 브레멘으로 떠나기 직전 프랑크푸르트의 슐테 코치가 나타났다. 차범근을 만난 슐테 코치는 "다른 팀으로 가면 안 된다. 프랑크푸르트로 와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슐테 코치가 구단과 협의한 끝에 제시한 계약금액이 차범근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차범근의 프로팀 입단교섭을 책임 맡은 재독한인회 여우종 회장은 "일단 브레멘에 가서 테스트를 받아 보고 다시 결정짓자"면서 차범근을 브레멘으로 데리고 갔다.
브레멘에 도착한 차범근은 7월 12일 브레멘 선수들과 함께 연습경기를 했다. 같은 팀 선수를 두 편으로 나눠 게임을 하면서 차범근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자리에서 차범근은 혼자 4골을 넣었다. 브레멘 관계자들의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계약을 체결하자고 서둘렀다. 이들이 제시한 계약조건도 프랑크푸르트 측에서 제시했던 조건보다는 휠씬 좋았다.
그러나 이 때 다시 슐테 코치가 나타났다. 브레멘보다 더 좋은 조건을 내놓을 테니 프랑크푸르트로 오라는 것이었다. 7월 13일 여우종 회장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돌아 온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와 계약을 했다. 7월 16일 오전 11시 계약기간은 1979년 7월부터 1980년 6월까지 1년으로 계약 금액은 30만 마르크(약 7,500만원). 계약기간 중 경기수당 및 득점수당 등은 구단규정에 준한다고 돼 있었다. 이로써 차범근은 서독 분데스리가의 프로축구선수가 됐다.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뒤 국내의 한 스포츠 주간지에 프로축구 진출을 준비하던 5년 세월을 뒤돌아보는 수기를 ‘슈팅 메시지’라는 이름으로 보냈다.
“고려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나는 축구선수로서 최초의 좌절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지 않은가. '대학을 졸업하면 군대에 갔다 와야 하고 군에서 제대하면 실업팀에서 뛰게 되겠지. 물론 그 동안 국가대표선수 생활은 계속 되겠지만 그것도 나이가 많아지면 그만두라고 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에게 돌아올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런 생각들이 계속 나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이 때 나에게 정신적인 식량을 준 사람이 지금의 아내(오은미)입니다. "그런 걱정이라면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면 먼저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면 바로 남미 이민을 떠납시다.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는 이민 조건도 그다지 까다롭지 않고 프로축구가 성행하는 나라니까 우리가 가서 생활기반을 굳히기에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브라질! 나는 그 때부터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세계무대로 진출한다. 나는 브라질로 간다. 브라질에 가서 프로축구선수가 된다.' 사람이란 반드시 꿈이 있어야 하겠더군요. 지금 와서 털어놓습니다만 저팬컵에 출전하기 전에 어떤 축구 애호가에 의해 나를 잉글랜드 1부리그에 보내는 작업이 조금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브라질 아니면 잉글랜드에 반드시 갈 수 있으리라고 마냥 부풀었었지요.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게 터져 나온 것이 서독행 이었습니다. 나를 아껴주는 많은 국내 팬은 내가 서독에서 단 한 게임(다름슈타트에서의 데뷔전을 뜻함)만 뛰고도 그렇게 유명해졌다 해서 무척 기뻐하셨지만 나로서는 사실 괴롭고 무거운 하루하루였습니다. 서독 프로축구의 수준과 그 무서움을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스피디한 경기 운영, 깊은 태클과 육중한 몸집, 그리고 긴 다리들. 이런 것이 내게는 너무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다시 서독에 오기까지의 5개월 반 동안 나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잡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인 두 가지 결함인 슛이 뜨는 것과 접근전에서의 순발력이 부족한 것을 뜯어고치기에 전념했습니다. 순발력을 키우기 위해 다른 선수들은 대개 축구볼을 옆으로 뛰어넘는 훈련을 합니다만 나는 축구볼의 10배 크기에 해당하는 시멘트 블록을 뛰어 넘었지요.
결국 나는 내게 맞는 새로운 슈팅기술을 개발했고 순발력을 높이는데도 성공했습니다. 이 훈련에 대해 부인 오은미 씨는 "완전히 한 템포 빨리 하려면 순발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이는 울퉁불퉁한 시멘트 블록을 옆으로 뛰어넘는 훈련을 계속했어요. 처음에는 1000번, 며칠 뒤에는 2000번 이렇게 강도를 높여가면서 거듭하는 그의 훈련은 참으로 눈물겨웠습니다.”
글=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사진=차범근 소장본
*9월 19일 차범근의 위대한 분데스리가 족적 2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축구선수 차범근에게 강한 인상을 처음 받은 때는 시골의 한 작은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1976년 초가을이었다.
한국은 1976년 9월 11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6회 박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 개막전에서 말레이시아와 대결했다. 말레이시아에는 수비의 명장 소친온과 거미처럼 많은 발을 가지고 빈틈없이 볼을 잡아낸다는 아르무감, 높은 득점력을 자랑하는 목타르 다하리가 있었다.
한국의 화랑은 말레이시아의 전력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던 만큼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공격을 펼쳤다. 그러나 이날 따라 골키퍼 김진복과 수비수 김철수, 김호곤의 호흡이 이상할 정도로 맞지 않았다. 수비수가 김진복에게 백패스 한다는 것이 말레이시아 선수에게 차단당하면서 1골을 빼앗기더니 연속해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했다. 그때마다 말레이시아는 득점과 연결시킴으로써 스코어는 눈 깜짝할 사이에 0-3으로 벌어졌다. 한국은 후반전에 전열을 가다듬어 박상인이 1골을 만회했으나 곧이어 목타르 다하리의 번개 같은 중거리 슛에 또 한골을 잃으면서 1-4로 여전히 3골 차로 뒤지고 있었다.
동대문운동장 좌측 스탠드에 설치된 전광판의 시계가 정확하게 7분을 남겨 놓은 시간에 차범근이 연출하는 기적 같은 드라마가 시작됐다.
차범근의 움직임은 마치 숲 속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자던 표범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한 차례 기지개를 한 뒤에 먹이를 향해 사납게 돌진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포진한 차범근이 포효하면서 적진을 헤집은 뒤 강하게 때린 볼이 그대로 말레이시아의 골문을 꿰뚫었다. 실의와 환멸에 빠졌던 스탠드의 관중석에서 약간의 박수소리가 터졌다. 멋진 플레이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으로 한국이 패배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박수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시 4분이 경과했을 무렵. 차범근의 발끝을 떠난 볼이 또 한 번 골네트를 흔들었다. 스탠드의 박수소리는 이전보다 커졌고, 경기종료 1분전 말레이시아 수비수가 시간을 끌기 위해 이리저리 드리블하는 것을 차단한 차범근의 발길이 번쩍하고 섬광을 터트렸다.
골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 소리보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더 크고 빨랐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적의 드라마가 차범근이라는 단 한 명의 활약으로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7분 드라마’가 펼쳐진 이듬해인 1977년 필자는 현대경제일보사(한국경제신문 전신)에 입사, 천직이 된 기자가 됐고 차범근은 공군에 입대하여 여전히 표범의 모습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1979년 10월 편집부에서 문화체육부로 발령을 받았을 때 아쉽게도 차범근은 한국을 떠나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차범근을 서독에서 만난 것은 1986년 2월이었다. 32년 만에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 대표팀은 독일 뒤스부르크에 훈련캠프를 차리고 해외 전지훈련을 하고 있었다. 8년 만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차범근도 이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레버쿠젠 집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필자는 뒤스부르크 캠프로 가기 전 차범근과 하루를 같이 지낼 수 있었다.
차범근의 하루는 축구의 하루였다. 축구를 하기 위해 눈을 떴고 축구를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훈련과 경기는 물론 식사를 하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조차도 축구를 위한 것이었다.
197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시도된 차범근의 서독행은 '국보 유출'이라는 세간의 여론으로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고심 끝에 축구협회는 차범근의 서독행을 공식적으로 허가했지만 정작 서독 땅을 밟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차범근은 1978년 12월 25일 다름슈타트 유니폼을 입고 보쿰을 상대로 독일 분데스리가에 첫 선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10년이나 이어질 '차붐'과 분데스리가의 긴 인연을 매개해줄 둥지는 다름슈타트가 아니었다. 차범근은 한 경기만을 치른 뒤 일단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병역 문제 등 서독 진출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하는 관문들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큰 소득도 있었다. 차범근은 보훔전에서 현지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활약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반년 뒤 성공적으로 분데스리가에 안착할 수 있었다.
차범근이 다름슈타트가 아닌 분데스리가의 다른 팀으로 가게 될 가능성은 귀국 직후부터 제기됐다. 다름슈타트와 계약 조건과 병역 문제 해결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차범근이 갈 수 있는 팀으로 가장 유력하게 떠오른 곳이 그의 실질적인 첫 친정이 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였다.
차범근은 1979년 5월 31일자로 공군에서 만기 제대했다. 이제 자유롭게 서독에 갈 수 있는 신분이 됐다. 서독행은 기정사실이 됐고 어떤 팀에서 뛰느냐가 관심이었다. 차범근 개인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계약을 맺고 있던 다름슈타트가 1978/1979시즌에 2부리그로 강등됐다는 점이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다름슈타트와 계약 관계를 성실하게 지키지 못했던 차범근은 2부 강등을 계기로 자유롭게 새로운 팀을 고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차범근은 팀이 정해지지 않은 관계로 보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얘기가 안 나왔으나 차범근의 서독행을 주선한 바듀즈 측은 일본의 오쿠데라보다는 더 많은 보수를 받도록 동분서주했다. 오쿠데라가 FC 쾰른과 계약할 때 받은 돈은 2년간 총액으로 25만 마르크였다. 당시 환율로 약 7,000만원이었다.
차범근의 서독행이 확정되자 대한축구협회는 그가 그 동안 한국축구 발전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해 국내무대 고별전을 특별히 마련했다. 1979년 6월17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연고대 OB전이었다. 차범근은 대학 시절 입었던 붉은 줄무늬의 고대 유니폼을 입고 국내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연고 OB전을 보려고 모여든 관중이 3만 명을 넘었다. 개회식이 진행되는 시간 본부석에서는 "지금 이 자리에는 여러분의 총애를 받아오던 차범근 선수가 나와 있습니다"하고 마이크로 소개했으며 차범근이 두 손을 쳐들고 앞뒤로 한 바퀴 도는 순간 스탠드의 박수와 함성은 그야말로 천지를 진동하는 듯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차범근이 볼을 잡기만 하면 스탠드의 박수와 함성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반드시 훌륭한 축구를 배워서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차범근은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언제나 여러분의 성원과 사랑이 나를 밀어 준다고 믿기에 마음 든든하게 뛰겠습니다." 차범근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역시 한국 땅이며 한국의 축구팬이기에 그는 고별사의 마지막 말에 "국내 축구팬의 사랑에 반드시 보답하겠다"는 말을 거듭 되풀이했다.
소속팀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차범근은 6월 22일 서울을 떠나 독일 쾰른으로 향했다. 재서독한국인축구협회장 한일동씨 집에 기거하면서 분데스리가 진입을 위한 마지막 수순에 들어갔다. 훈련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름슈타트와 관계를 말끔히 정리한 차범근은 이제 최종 관문을 앞두고 있었다. 기회의 땅 독일을 찾은 동양의 젊은 선수에게 가장 먼저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낸 곳은 바로 SV 베르더 브레멘이었다. 브레멘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은 것은 7월 11일이었다. 차범근이 브레멘으로 떠나기 직전 프랑크푸르트의 슐테 코치가 나타났다. 차범근을 만난 슐테 코치는 "다른 팀으로 가면 안 된다. 프랑크푸르트로 와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슐테 코치가 구단과 협의한 끝에 제시한 계약금액이 차범근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차범근의 프로팀 입단교섭을 책임 맡은 재독한인회 여우종 회장은 "일단 브레멘에 가서 테스트를 받아 보고 다시 결정짓자"면서 차범근을 브레멘으로 데리고 갔다.
브레멘에 도착한 차범근은 7월 12일 브레멘 선수들과 함께 연습경기를 했다. 같은 팀 선수를 두 편으로 나눠 게임을 하면서 차범근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자리에서 차범근은 혼자 4골을 넣었다. 브레멘 관계자들의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계약을 체결하자고 서둘렀다. 이들이 제시한 계약조건도 프랑크푸르트 측에서 제시했던 조건보다는 휠씬 좋았다.
그러나 이 때 다시 슐테 코치가 나타났다. 브레멘보다 더 좋은 조건을 내놓을 테니 프랑크푸르트로 오라는 것이었다. 7월 13일 여우종 회장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돌아 온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와 계약을 했다. 7월 16일 오전 11시 계약기간은 1979년 7월부터 1980년 6월까지 1년으로 계약 금액은 30만 마르크(약 7,500만원). 계약기간 중 경기수당 및 득점수당 등은 구단규정에 준한다고 돼 있었다. 이로써 차범근은 서독 분데스리가의 프로축구선수가 됐다.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뒤 국내의 한 스포츠 주간지에 프로축구 진출을 준비하던 5년 세월을 뒤돌아보는 수기를 ‘슈팅 메시지’라는 이름으로 보냈다.
“고려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나는 축구선수로서 최초의 좌절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지 않은가. '대학을 졸업하면 군대에 갔다 와야 하고 군에서 제대하면 실업팀에서 뛰게 되겠지. 물론 그 동안 국가대표선수 생활은 계속 되겠지만 그것도 나이가 많아지면 그만두라고 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에게 돌아올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런 생각들이 계속 나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이 때 나에게 정신적인 식량을 준 사람이 지금의 아내(오은미)입니다. "그런 걱정이라면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면 먼저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면 바로 남미 이민을 떠납시다.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는 이민 조건도 그다지 까다롭지 않고 프로축구가 성행하는 나라니까 우리가 가서 생활기반을 굳히기에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브라질! 나는 그 때부터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세계무대로 진출한다. 나는 브라질로 간다. 브라질에 가서 프로축구선수가 된다.' 사람이란 반드시 꿈이 있어야 하겠더군요. 지금 와서 털어놓습니다만 저팬컵에 출전하기 전에 어떤 축구 애호가에 의해 나를 잉글랜드 1부리그에 보내는 작업이 조금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브라질 아니면 잉글랜드에 반드시 갈 수 있으리라고 마냥 부풀었었지요.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게 터져 나온 것이 서독행 이었습니다. 나를 아껴주는 많은 국내 팬은 내가 서독에서 단 한 게임(다름슈타트에서의 데뷔전을 뜻함)만 뛰고도 그렇게 유명해졌다 해서 무척 기뻐하셨지만 나로서는 사실 괴롭고 무거운 하루하루였습니다. 서독 프로축구의 수준과 그 무서움을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스피디한 경기 운영, 깊은 태클과 육중한 몸집, 그리고 긴 다리들. 이런 것이 내게는 너무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다시 서독에 오기까지의 5개월 반 동안 나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잡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인 두 가지 결함인 슛이 뜨는 것과 접근전에서의 순발력이 부족한 것을 뜯어고치기에 전념했습니다. 순발력을 키우기 위해 다른 선수들은 대개 축구볼을 옆으로 뛰어넘는 훈련을 합니다만 나는 축구볼의 10배 크기에 해당하는 시멘트 블록을 뛰어 넘었지요.
결국 나는 내게 맞는 새로운 슈팅기술을 개발했고 순발력을 높이는데도 성공했습니다. 이 훈련에 대해 부인 오은미 씨는 "완전히 한 템포 빨리 하려면 순발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이는 울퉁불퉁한 시멘트 블록을 옆으로 뛰어넘는 훈련을 계속했어요. 처음에는 1000번, 며칠 뒤에는 2000번 이렇게 강도를 높여가면서 거듭하는 그의 훈련은 참으로 눈물겨웠습니다.”
글=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사진=차범근 소장본
*9월 19일 차범근의 위대한 분데스리가 족적 2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