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다.
세계무대로 향한 꿈을 펼치기에 앞서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본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듯이 상대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까닭이다.
선배들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일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선배들의 지혜와 슬기를 배움으로써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 할 수 있는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조선 말기에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된 동네축구로부터 시작된 한국축구의 초창기 역사는 구전이나 구전을 전해들은 축구 원로들의 구술을 통해 기록하는 방법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일정시대 축구는, 그 나마 신문에 난 촌평이나 원로 축구인 들의 기억에 의한 구술은 매우 종요한 자료가 됐다. 물론 축구에 섞인 얘기들은 공식 비공식적인 역사와 야사로 구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과 관련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소년 펠레가 영광의 데뷔전을 가진 대회로 영원히 기억 되고 있는 제 6회 스웨덴 월드컵은 17세의 무명소년 펠레가 혜성처럼 나타나 브라질에게 첫 우승의 영광을 안겼고, 프랑스의 퐁텐느가 13골을 기록 역대 최고 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 영국연합 4개 팀이 모두 본선에 진출한 희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가 하면, 브라질이 완성한 4-2-4시스템을 새롭게 선보여 세계 축구관계자들의 시선을 끓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축구 우승국 소련도 처음으로 참가 본선에 올랐다.
우리나라도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1958년 스웨덴 월드컵지역예선 출전신청서가 축구협회에 도착한 것은 1956년 말이었다. 축구협회 박정빈 부회장은 출전신청서를 한번 훑어본 뒤 김덕준 사무국장에게 처리하라고 지시하며 서류를 건네줬다. 김덕준 국장은 신청마감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다가 연말이라 업무가 많이 밀려 박정빈 부회장으로부터 받은 서류를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출전신청서는 지역예선이 한창 진행 중인 1957년 6월에서야 바깥구경을 했으니 이미 신청서류로서 가치를 잃은 후였다. 김윤기 회장이 한국은 왜 월드컵 예선전에 참가 하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박정빈 부회장은 그제야 “아차” 싶었던 것이다. 박정빈 부회장이 김덕준 국장을 다그치면서 서랍을 열어보니 그 속에서 스웨덴 월드컵 출전신청서가 잠자고 있었다.
부랴부랴 서류를 작성하여 FIFA로 보냈지만 FIFA는 절차상의 미비를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월드컵 출전신청서가 서랍에서 잠을 자는 바람에 월드컵에 예선전에 출전 할 수 없었다면, 지금은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일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축구협회가 이사진 중심행정이었고, 사무직 직원은 고작 5명에 불과, 책임행정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또한 당시에는 올림픽이 월드컵 보다 비중이컸기에 그냥 실수로 넘어 갔다.
박경호(제1회 아시안컵 출전 대표선수)
글쓴이 박경호 선생은 1930년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1946년 월남하여 경신중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6년~1958년 대표선수로 활약했으며 제1회아시안컵 우승 멤버다. 1969년 모교인 경희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 한양공고 건국대 육사 서울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KBS 축구해설위원, 스포츠서울 칼럼니스트로 활약했으며 일본 오이타 클럽 기술고문으로 10년 넘게 활동했다.
세계무대로 향한 꿈을 펼치기에 앞서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본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듯이 상대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까닭이다.
선배들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일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선배들의 지혜와 슬기를 배움으로써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 할 수 있는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정시대 축구는, 그 나마 신문에 난 촌평이나 원로 축구인 들의 기억에 의한 구술은 매우 종요한 자료가 됐다. 물론 축구에 섞인 얘기들은 공식 비공식적인 역사와 야사로 구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과 관련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소년 펠레가 영광의 데뷔전을 가진 대회로 영원히 기억 되고 있는 제 6회 스웨덴 월드컵은 17세의 무명소년 펠레가 혜성처럼 나타나 브라질에게 첫 우승의 영광을 안겼고, 프랑스의 퐁텐느가 13골을 기록 역대 최고 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 영국연합 4개 팀이 모두 본선에 진출한 희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가 하면, 브라질이 완성한 4-2-4시스템을 새롭게 선보여 세계 축구관계자들의 시선을 끓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축구 우승국 소련도 처음으로 참가 본선에 올랐다.
우리나라도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1958년 스웨덴 월드컵지역예선 출전신청서가 축구협회에 도착한 것은 1956년 말이었다. 축구협회 박정빈 부회장은 출전신청서를 한번 훑어본 뒤 김덕준 사무국장에게 처리하라고 지시하며 서류를 건네줬다. 김덕준 국장은 신청마감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다가 연말이라 업무가 많이 밀려 박정빈 부회장으로부터 받은 서류를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출전신청서는 지역예선이 한창 진행 중인 1957년 6월에서야 바깥구경을 했으니 이미 신청서류로서 가치를 잃은 후였다. 김윤기 회장이 한국은 왜 월드컵 예선전에 참가 하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박정빈 부회장은 그제야 “아차” 싶었던 것이다. 박정빈 부회장이 김덕준 국장을 다그치면서 서랍을 열어보니 그 속에서 스웨덴 월드컵 출전신청서가 잠자고 있었다.
부랴부랴 서류를 작성하여 FIFA로 보냈지만 FIFA는 절차상의 미비를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월드컵 출전신청서가 서랍에서 잠을 자는 바람에 월드컵에 예선전에 출전 할 수 없었다면, 지금은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일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축구협회가 이사진 중심행정이었고, 사무직 직원은 고작 5명에 불과, 책임행정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또한 당시에는 올림픽이 월드컵 보다 비중이컸기에 그냥 실수로 넘어 갔다.
박경호(제1회 아시안컵 출전 대표선수)
글쓴이 박경호 선생은 1930년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1946년 월남하여 경신중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6년~1958년 대표선수로 활약했으며 제1회아시안컵 우승 멤버다. 1969년 모교인 경희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 한양공고 건국대 육사 서울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KBS 축구해설위원, 스포츠서울 칼럼니스트로 활약했으며 일본 오이타 클럽 기술고문으로 10년 넘게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