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김호냐, 이회택이냐.’ 1990 이탈리아월드컵 축구 대표팀 지휘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두 프로 감독의 경쟁은 1988년 여름 프로리그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서울올림픽을 불과 81일 앞두고 충격 사퇴를 결행한 박종환 감독에 이어 7월5일 88올림픽 축구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유공의 김정남 감독의 임기가 올림픽에 국한된 ‘시한부’라는 소문이 축구계에 공공연히 떠돌았다. 그런 가운데 축구계에선 차기 대권의 경쟁후보로 프로리그 우승 가시권에 접어든 포철 이회택 감독과 현대 김호 감독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김정남호’가 올림픽 8강 문턱에서 좌초되자 차기 대권 경쟁은 표면으로 급부상, 축구계의 초미의 뉴스거리가 됐다.
1988시즌 들어 감독으로 승격한 이회택 감독은 끈끈한 인화술로 팀을 독려, 화끈한 공격축구를 구사하며 우승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역시 현대팀 부활로 한일은행 감독에서 일약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한 김호감독은 특유의 ‘공간 축구’를 앞세워 우승을 위한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프로리그 제패는 올림픽 이후의 대표팀 지휘권을 쥐는 지름길이었기에 이들의 자존심 대결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어 갔다.
결국 11월2일 부산에서 대우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확정지은 포철 이회택감독이 사흘 뒤 1990이탈리아 월드컵 까지 보장된 대표팀 감독에 선임됨으로써 무성했던 하마평의 실제 주인공이 됐다.
이날 상비군관리위원회를 마친 손수영 사무총장은 “88시즌 우승으로 지도력을 인정 받았고 넓은 포용력, 그리고 승운이 따르는 게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고 선임 배경을 밝혔다.
동북고 한양대의 학연과 인맥, ‘의리파’라는 인간적 매력 등으로 축구협회내에 상당한 지지기반을 다져놓았으면서도 이회택 감독의 핸디캡이 돼왔던 지도자적 능력이 객관적으로 평가받은 셈이다.
그러나 서울올림픽 전후로 휘몰아친 일련의 대표탐 감독 개편 회오리는 의혹이 불씨를 휘날렸던게 사실이다.
축구협회가 김우중 회장 체제로 개편되면서 자신의 신임여부를 놓고 투표까지 가는 치욕을 당했던 박종환 감독이 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 도중 “협회가 후임 감독을 거론하고 있는데 어떻게 팀을 이끌어 가겠느냐”며 사퇴를 선언하자 협회는 ‘언어 도단’이라며 강경 부인했다.
최순영 회장 퇴진의 한 주역이었던 이회택 감독이 ‘논공행상’식 보상과 협회 실세인 이재명부회장과의 친분 등으로 후임 감독 ‘0순위’로 꼽혔다.
하지만 축구협회와 정면충돌한 박종환 감독 사퇴 파문이 가시기 전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협회 실세측의 상황 평가로 이회택의 대표팀 감독 데뷔는 우승 뒤로 늦쳐졌다는 후문이다. 온건 이미지의 김정남 감독이 올림픽 때까지는 대타로 나섰고 결국 포철은 우승했다. 따라서 선임명분은 갖춰 졌고 마침내 이회택감독-이차만코치(대우 감독)의 대표팀 코칭스프가 우여곡절 끝에 탄생했다.
그러나 대우가 포철 우승의 최대 고비였던 막판 2게임에서 공교롭게도 모두 패해 의혹을 샀다.
김호 감독이 이끄는 자동차 라이벌 현대의 우승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소문과 대우를 이끌고 있는 축구협회 이재명 부회장이 이 감독의 입지 마련을 위해서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등 풍문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오비이락’이라고 강변하는 대우와 ‘어불성설’이라고 부인하는 축구협회는 한동안 매서운 의혹의 곁눈질을 감수해야 했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서울올림픽을 불과 81일 앞두고 충격 사퇴를 결행한 박종환 감독에 이어 7월5일 88올림픽 축구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유공의 김정남 감독의 임기가 올림픽에 국한된 ‘시한부’라는 소문이 축구계에 공공연히 떠돌았다. 그런 가운데 축구계에선 차기 대권의 경쟁후보로 프로리그 우승 가시권에 접어든 포철 이회택 감독과 현대 김호 감독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김정남호’가 올림픽 8강 문턱에서 좌초되자 차기 대권 경쟁은 표면으로 급부상, 축구계의 초미의 뉴스거리가 됐다.
1988시즌 들어 감독으로 승격한 이회택 감독은 끈끈한 인화술로 팀을 독려, 화끈한 공격축구를 구사하며 우승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역시 현대팀 부활로 한일은행 감독에서 일약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한 김호감독은 특유의 ‘공간 축구’를 앞세워 우승을 위한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프로리그 제패는 올림픽 이후의 대표팀 지휘권을 쥐는 지름길이었기에 이들의 자존심 대결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어 갔다.
결국 11월2일 부산에서 대우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확정지은 포철 이회택감독이 사흘 뒤 1990이탈리아 월드컵 까지 보장된 대표팀 감독에 선임됨으로써 무성했던 하마평의 실제 주인공이 됐다.
이날 상비군관리위원회를 마친 손수영 사무총장은 “88시즌 우승으로 지도력을 인정 받았고 넓은 포용력, 그리고 승운이 따르는 게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고 선임 배경을 밝혔다.
동북고 한양대의 학연과 인맥, ‘의리파’라는 인간적 매력 등으로 축구협회내에 상당한 지지기반을 다져놓았으면서도 이회택 감독의 핸디캡이 돼왔던 지도자적 능력이 객관적으로 평가받은 셈이다.
그러나 서울올림픽 전후로 휘몰아친 일련의 대표탐 감독 개편 회오리는 의혹이 불씨를 휘날렸던게 사실이다.
축구협회가 김우중 회장 체제로 개편되면서 자신의 신임여부를 놓고 투표까지 가는 치욕을 당했던 박종환 감독이 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 도중 “협회가 후임 감독을 거론하고 있는데 어떻게 팀을 이끌어 가겠느냐”며 사퇴를 선언하자 협회는 ‘언어 도단’이라며 강경 부인했다.
최순영 회장 퇴진의 한 주역이었던 이회택 감독이 ‘논공행상’식 보상과 협회 실세인 이재명부회장과의 친분 등으로 후임 감독 ‘0순위’로 꼽혔다.
하지만 축구협회와 정면충돌한 박종환 감독 사퇴 파문이 가시기 전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협회 실세측의 상황 평가로 이회택의 대표팀 감독 데뷔는 우승 뒤로 늦쳐졌다는 후문이다. 온건 이미지의 김정남 감독이 올림픽 때까지는 대타로 나섰고 결국 포철은 우승했다. 따라서 선임명분은 갖춰 졌고 마침내 이회택감독-이차만코치(대우 감독)의 대표팀 코칭스프가 우여곡절 끝에 탄생했다.
그러나 대우가 포철 우승의 최대 고비였던 막판 2게임에서 공교롭게도 모두 패해 의혹을 샀다.
김호 감독이 이끄는 자동차 라이벌 현대의 우승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소문과 대우를 이끌고 있는 축구협회 이재명 부회장이 이 감독의 입지 마련을 위해서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등 풍문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오비이락’이라고 강변하는 대우와 ‘어불성설’이라고 부인하는 축구협회는 한동안 매서운 의혹의 곁눈질을 감수해야 했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