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의 발롱도르] K리그에서 '용병'이란 말부터 없애자
입력 : 2012.05.11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아직 정확하게 모든 일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지난 주에 FC서울의 아디가 한 사람으로부터 인종차별을 당했다. 한국 사회에서 수면 위로 나타나는 인종차별 논란이 많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꽤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아디를 만나 몇 차례 길게 인터뷰를 했던 터라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디가 2010년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다들 검둥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라며 웃었던 기억이 났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사회에서의 인종차별은 수면 위로 잘 떠오르지 않을 뿐, 도처에 잠복해 있다. TV에서는 “동남아시아 사람”이라는 표현이 난무하고, 아디를 조롱하는데도 쓰였던 ‘흑형’이라는 단어는 거의 관용어 수준이다. 인터넷 댓글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귀네슈 감독의 통역을 맡았다가 ‘초능력자’에서 영화배우로 변신한 터키인 에네스 카야는 인터뷰 중에 “나는 좀 하얘서 인종차별을 안 겪었다. 그런데 좀 까만 내 친구들은 한국에서 살기가 쉽지 않았다”라고 말했었다.

인종차별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모두가 안다. 아디를 조롱한 사람도, 에네스의 친구를 놀리던 이들도 자신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길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이유는 언어에 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국에는 인종차별적 단어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이런 단어들을 쓰게 되고, 나중에는 감각이 마비된다. 그리고 이런 단어들은 우리 주위 사람들도 감염시킨다.

‘그까짓 단어 하나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냈지만, 인간을 틀에 가두는 큰 힘을 가졌다. 언어는 힘이 세다. 승리의 언어, 승리의 표현을 가진 이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선거철이 되면 많은 언론과 정당에서 각자의 승리를 위해 멋진 슬로건을 만드는데 사활을 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서울시장보궐선거를 물들였던 ‘보편적 복지’와 ‘망국적 포퓰리즘’의 대결을 떠올려보자.

인종차별과 인종차별적 언어는 전 사회에 걸친 문제다. 한 번에 그 현상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쓰던 문제의 단어들만 쓰지 않아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축구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을 좋아하고, 서울에서 은퇴하길 바라는 아디와 다른 외국인 선수들을 위해서,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표현을 바꿔야 한다. 가장 먼저 바꿔야 할 단어는 용병이다.

용병이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관용적 표현이 됐다. 축구뿐 아니라 다른 종목에서도 용병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쓰인다. 용병의 사전적 정의는 ‘지원한 사람에게 봉급을 주어 병력에 복무하게 함. 또는 그렇게 고용한 병사’이다. 한국의 군사문화와 인종차별이 뒤섞여 굳어진 표현인 셈이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 외신을 아무리 뒤져도 박지성, 박주영, 정조국 그리고 구자철에게 이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적어도 필자는 본적이 없다.

‘스포츠는 전쟁이고, 이들은 봉급을 주고 고용한 병사가 아닌가?’라고 따져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프로스포츠에서는 누구나 돈을 받는다. 모두 돈을 벌기 위해서 뛴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인 선수들도 용병인 셈이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서 뛰는 한국인 선수들을 ‘용병파’라고 하지 않는다. ‘해외파’라고 한다. 이 표현은 은근히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군사적인 용어인 것은 인정하지만, 인종차별적인 부분은 미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재미 있는예가 있다. 최근 외국계 금융사들이 많이 있는 광화문이나 강남 일대에 가면 한국에서 근무하는 ‘화이트 칼라’ 외국인들이 많다. 이들은 양복을 잘 차려 입고 다닌다. 아무도 이들에게 용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용병이라는 단어가 단지 군사주의의 잔재라면, 이들에게도 쓰여야 한다. 하지만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이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국 무대에서 뛰는 다른 국적의 선수들에게는 ‘외국인 선수’, ‘외인 선수’라는 표현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브라질 출신’, ‘몬테네그로 국가대표’ 그리고 ‘칠레 특급’과 같은 단어들도 좋다. 외국 사람들도 그런 표현은 쓰지 않는다. 외신에서는 한국인 선수들 앞에 ‘한국인’, ‘한국 대표선수’라는 표현을 주로 붙인다. 외국 축구중계를 보다가 박지성을 ‘Korean international’이라고 부르는 걸 들어본 일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외국에는 인종차별이 없다는 게 아니다. 인종차별적 단어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TV중계나 신문지상에서는 ‘용병’이라는 단어가 쓰이지는 않는다. 이런 단어를 쓰지 않는 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꼬리표는 가장 떼기 힘들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사안은 심각하지만, 시작은 간단하다. 이제 ‘용병’이라는 단어를 버려야 할 때다.

글= 류청 기자

오늘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