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헌의 나도 선수다] 제16화 - 등번호, 숫자 그 이상의 '의미'
입력 : 2013.06.23기사보내기 :  트위터  페이스북
[스포탈코리아] 축구의 고수가 되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목표가 실현되는 그날까지. 매주 새로운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한 남자의 좌충우돌 도전기를 즐겨보시라. 그리고 대리만족을 통해 축구와 인생을 더욱 사랑하는 계기를 만들길 바란다.

축구를 좋아한다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봤을 법한게 바로 등번호다. 그깟 숫자가 무슨 대수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축구선수에게 등번호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이며 이런저런 얽힌 사연들까지 숨겨져 있다. 때문에 선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등번호를 달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인생의 잭팟'을 꿈꾸며 사비까지 털어 특수 제작한 '777번'을 단 내 백수 친구 고모씨가 그러하다.

등번호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28년으로 알려져 있다. 8월 25일 셰필드 웬즈데이와 아스날, 첼시와 스윈지 시티전 두 경기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했다. 공식 경기에서는 1933년 에버튼과 맨체스터 시티의 FA컵 결승전이 최초였다. 이후 1937년 스코틀랜드-잉글랜드전에서 A매치 사상 처음으로 등번호가 등장했으며 월드컵에 등번호가 처음 사용한 것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다.

초창기 등번호 선택 방법은 매우 단순했다. 1930년대 아스널의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 선보인 WM 포메이션에 따라 골키퍼는 1번, 풀백 3명은 우측부터 2, 5, 3번, 하프백 2명은 4, 6번, W모양의 공격라인은 7~11번이 주어졌다. 그 당시에는 교체 선수가 없었기에 1~11번 이외의 번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1965년부터 경기 중 선수 교체가 허용되면서 11번보다 높은 숫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12번은 팀의 서포터스를 의미한다고 해서 많은 팀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이후 등번호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낳았은데 칠레 출신의 스트라이커 이반 사모라노의 '웃픈(웃기지만 슬픈)' 사연을 빼놓을 수 없다. 인터 밀란에서 9번을 달았던 사모라노는 1997년 불세출의 축구스타 호나우도가 주세페 메아짜에 입성하면서 등번호 9번을 달게 되자 새로운 번호를 달아야 했다. 고민 끝에 사모라노는 등번호 18번을 달면서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1과 8 숫자 중간에 '+'기호를 그려 넣은 것. '1+8=9'라는 꿈보다 좋은 해몽이었다.

등번호는 특별한 기록을 기념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2011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 예지 두덱은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A매치 통산 59경기 출장에 그쳐 폴란드 축구 명예의 전당(A매치 60회 출전 조건)에 가입할 수 없었다. 이에 폴란드축구협회(PZPN)는 폴란드 축구에 헌신한 두덱의 업적을 기리어 지난 4일 리히텐슈타인과의 친선경기에서 그에게 60번째 A매치 출전 기회를 부여하고 대표팀 은퇴식을 치뤄졌다. 이날 두덱은 60번째 A매치 출전을 기념해 등번호 60번을 달았다.

국내에서는 김병지의 500번이 많은 화제를 뿌렸다. 2009년 11월 1일 당시 경남 소속이었던 김병지는 500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전인미답의 500경기 출전을 자축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시즌 개막전 500번 등록을 시도했다가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퇴짜를 맞았던 김병지는 차선책으로 500경기 출전까지 남은 29경기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29번을 달기도 했다. 최은성(전북) 역시 올해 3월 9일 500경기 출전해 기념해 등번호 500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나섰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FIFA)가 주관하는 월드컵의 경우 등번호의 선택이 제한적이다. 1~23번 이외의 번호는 사용할 수 없으며 1번은 반드시 골키퍼가 달아야 한다. 영구 결번도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협회가 마라도나의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하겠다고 10번이 빠진 명단을 제출했다가 FIFA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완강히 버텼지만 예비 골키퍼에게 10번을 주겠다는 FIFA의 최후의 통첩에 23번을 달았던 아리엘 오르테가에게 10번을 부여했다.

글=이경헌 올댓부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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