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탈코리아] 1960년 10월 14일 서울 효창구장에서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국제대회였다.
4년 전인 1956년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당당히 우승하여 대회 개최권을 획득한 것이다. 한국은 2연패를 노리며 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국내에 국제축구대회를 개최할 만한 시설을 갖춘 잔디구장은 없었다.
홍콩 제1회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 우승결과를 보고하러 경무대에 들어간 대표팀 단장은 제2회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여야 할 사항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받은 이대통령은 국유지인 효창공원 내에 축구경기장을 건설토록 지시했다. 1959년 7월 이기붕 대한체육회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제축구경기장건설 준비소위원회를 결성하고, 임흥순 서울시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추진위원회가 결성됨으로써 본격적인 건설 들어갔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님 묘역 앞에 효창구장을 건설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달리 적당한 장소가 없었던 데다가 장소변경 문제로 시간을 끌 경우 대회 자체가 연기되거나 무산할 염려가 있음으로 여론에 건립 불가피함을 호소했다.
대통령의 재가와 여론의 도움을 받아 효창공원에 7,822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기본설계에 들어갔다. 총공사비는 2억 3천만 원이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언덕을 깎고 흙을 돋우어 스탠드를 설치함으로써 건물용 구조물이 아닌 까닭에 2만 명을 수용하는 운동장이라고 하나 둑을 깎아서 만든 운동장이기에 공기는 불과 4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해 11월 27일 2만 명을 수용하는 국내최초의 잔디구장이 완공되었다. 축구 도입이래 축구전용구장을 갖게 된 축구인 들의 감회는 실로 형언 할 수 없었다. 역사적인 효창구장을 기념하는데 가장 뜻 깊은 행사가 무엇인가를 논의 하다가 경평전을 갖기로 했다. 비록 남북이 분단돼 실질적인 북한 선수들이 참가하지는 못할망정 피난 나온 선수들로 팀을 구성하여 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어렵게 건립한 효창구장은 개장 때부터 많은 화제를 뿌렸다. 당시만하더라도 대부분의 축구 선수들은 개인적인 성취욕 보다는 나라의 명예를 우선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축구인 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열성으로 우리는 국제규격의 전용축구경기장을 가지게 되어, 축구인 들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고, 더욱이 우리나라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한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1960년 10월 24일 역사적인 제 2회 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가 개막 되었다. 이 대회 본선 진출국은 한국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자유중국, 월남 등 4개국이었다. 입장권은 이날 아침에 모두 매진되었다. 효창구장의 수용 능력은 2만 명으로 잡았다. 물론 정확한 계산이 아닌 어림짐작으로 잡은 수치였다. 그러나 대회본부측은 입석을 감안하여 3만장의 표를 팔았다.
오후에 경기가 열렸는데 이미 아침부터 효창구장 일대가 사람으로 뒤덮였다. 이 날 효창공원 일대에 모인 사람의 수는 대략 1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문제는 효창구장의 수용능력이었다. 후일 실제 효창구장 수용인원을 계산 했을 때 당시 3만 명의 입장권을 판 대회 본부의 계산이 얼마나 엉터리였던가를 알 수 있었다. 한사람이 차지하는 스탠드 넓이를 60cm로 잡았을 때 1만 6천명이 실제 효창구장의 수용능력 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3만 명이 몰렸으니 스탠드뿐만 아니라 그라운드까지 관중들이 침범하고 말았다. 표를 산 3만 명이 모두 입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입장하지 못한 관중들은 차량출입문을 부수고 밀려들어 왔다.
운동장 안팎의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어렵게 경기가 시작되었고, 혼란이 도를 넘자 경찰은 주심에게 경기를 중지 시키려 했다. 이때는 이미 한국이 이스라엘을 3-0으로 앞서고 있었고, 만일 경기가 중단되면 무효가 될 판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용식 코치와 박재승 트레이너는 경찰의 요구를 제지하고 경기 중단의 위기를 모면했다. 주심 요고하마씨는 경기 시작 전에 이미 너무 혼잡함을 지적하며 경기 진행이 어렵다고 버틴 일이 있어 경찰의 중지 요청을 했더라면 이날의 경기는 무효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아시아 선수권대회 2연패가 이루어 졌다. 경기가 끝나 이스라엘 조비 단장은 우리는 한국선수들에게 완패한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난잡한 관중들의 기세에 졌다고 말했다.
한국최초의 국제경기장, 효창구장은 이렇게 우리가 아시아 최강으로 계속 군림 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한국축구백년사' 제공
박경호(제1회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출전 대표선수)
4년 전인 1956년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당당히 우승하여 대회 개최권을 획득한 것이다. 한국은 2연패를 노리며 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국내에 국제축구대회를 개최할 만한 시설을 갖춘 잔디구장은 없었다.
홍콩 제1회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 우승결과를 보고하러 경무대에 들어간 대표팀 단장은 제2회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여야 할 사항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받은 이대통령은 국유지인 효창공원 내에 축구경기장을 건설토록 지시했다. 1959년 7월 이기붕 대한체육회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제축구경기장건설 준비소위원회를 결성하고, 임흥순 서울시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추진위원회가 결성됨으로써 본격적인 건설 들어갔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님 묘역 앞에 효창구장을 건설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달리 적당한 장소가 없었던 데다가 장소변경 문제로 시간을 끌 경우 대회 자체가 연기되거나 무산할 염려가 있음으로 여론에 건립 불가피함을 호소했다.
대통령의 재가와 여론의 도움을 받아 효창공원에 7,822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기본설계에 들어갔다. 총공사비는 2억 3천만 원이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언덕을 깎고 흙을 돋우어 스탠드를 설치함으로써 건물용 구조물이 아닌 까닭에 2만 명을 수용하는 운동장이라고 하나 둑을 깎아서 만든 운동장이기에 공기는 불과 4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해 11월 27일 2만 명을 수용하는 국내최초의 잔디구장이 완공되었다. 축구 도입이래 축구전용구장을 갖게 된 축구인 들의 감회는 실로 형언 할 수 없었다. 역사적인 효창구장을 기념하는데 가장 뜻 깊은 행사가 무엇인가를 논의 하다가 경평전을 갖기로 했다. 비록 남북이 분단돼 실질적인 북한 선수들이 참가하지는 못할망정 피난 나온 선수들로 팀을 구성하여 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어렵게 건립한 효창구장은 개장 때부터 많은 화제를 뿌렸다. 당시만하더라도 대부분의 축구 선수들은 개인적인 성취욕 보다는 나라의 명예를 우선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축구인 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열성으로 우리는 국제규격의 전용축구경기장을 가지게 되어, 축구인 들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고, 더욱이 우리나라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한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1960년 10월 24일 역사적인 제 2회 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가 개막 되었다. 이 대회 본선 진출국은 한국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자유중국, 월남 등 4개국이었다. 입장권은 이날 아침에 모두 매진되었다. 효창구장의 수용 능력은 2만 명으로 잡았다. 물론 정확한 계산이 아닌 어림짐작으로 잡은 수치였다. 그러나 대회본부측은 입석을 감안하여 3만장의 표를 팔았다.
오후에 경기가 열렸는데 이미 아침부터 효창구장 일대가 사람으로 뒤덮였다. 이 날 효창공원 일대에 모인 사람의 수는 대략 1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문제는 효창구장의 수용능력이었다. 후일 실제 효창구장 수용인원을 계산 했을 때 당시 3만 명의 입장권을 판 대회 본부의 계산이 얼마나 엉터리였던가를 알 수 있었다. 한사람이 차지하는 스탠드 넓이를 60cm로 잡았을 때 1만 6천명이 실제 효창구장의 수용능력 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3만 명이 몰렸으니 스탠드뿐만 아니라 그라운드까지 관중들이 침범하고 말았다. 표를 산 3만 명이 모두 입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입장하지 못한 관중들은 차량출입문을 부수고 밀려들어 왔다.
운동장 안팎의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어렵게 경기가 시작되었고, 혼란이 도를 넘자 경찰은 주심에게 경기를 중지 시키려 했다. 이때는 이미 한국이 이스라엘을 3-0으로 앞서고 있었고, 만일 경기가 중단되면 무효가 될 판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용식 코치와 박재승 트레이너는 경찰의 요구를 제지하고 경기 중단의 위기를 모면했다. 주심 요고하마씨는 경기 시작 전에 이미 너무 혼잡함을 지적하며 경기 진행이 어렵다고 버틴 일이 있어 경찰의 중지 요청을 했더라면 이날의 경기는 무효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아시아 선수권대회 2연패가 이루어 졌다. 경기가 끝나 이스라엘 조비 단장은 우리는 한국선수들에게 완패한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난잡한 관중들의 기세에 졌다고 말했다.
한국최초의 국제경기장, 효창구장은 이렇게 우리가 아시아 최강으로 계속 군림 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한국축구백년사' 제공
박경호(제1회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출전 대표선수)